다시봄날편지16

2023.5.4 안도현 <논물 드는 5월에>

by 박모니카

자연은 어찌 그리 욕심이 없을까요. 세상사람들 눈에 더 띄고 싶어서 하루라도 예쁜 그 모습간직하려고 수단을 부릴 만도 하건만 그렇지 않아요. 하얀 조팝꽃이 더 하얀 이팝꽃에게, 연분홍 진달래가 진분홍 철쭉에게 어느새 자리배치를 끝냈더군요. 어제 아침엔 벗이 산책하면서 찍은거라고 등나무 꽃 사진을 보냈더군요. 보는 순간 ‘아 오동나무꽃도 등나무 꽃에게 자리를 내주는구나’ 생각했어요. 사진으로 느끼는 등나무꽃은 향기가 나질 않아서 점심 후 그곳으로 걸었어요. 나무덩쿨 중 가장 화려하고 신비로운 총상꽃차례[總狀花序]를 가진 꽃은 등나무꽃이 아닐까요. 말벌 몇 마리가 저보다 더 빨리 와서 향기 속에 놀고 있더군요. 제가 그 벌들을 무서워할까요. 사진 몇 장같이 찍자해도 어찌나 방정맞은지 눈인사만 하고 말았네요. 등나무줄기는 지팡이로도 쓰이구요. 밑으로 알알이 달린 꽃차례는 마치 포도알송이 같아요. 결혼 초 시아버지께서 맛있는 포도농사법을 알려주셨지요. 생전처음 포도농사를 짓고 한여름 모기장 속에서 어린 두 아이 데리고 수확한 포도를 다듬고 포장해서 포도를 팔았던 때가 있었거든요. 저 정말 별거 다 해 봤지요. 갑자기 가슴속에 뜨끈한 물방울이 고이네요. 하지만 그때처럼 달콤한 때가 또 있었을까 싶어요. 세상에서 가장 크고 달콤한 포도를 제 손으로 따고 나누고 먹어봤으니까요. 고생은 어려운 삶이 아니라 ‘뜨겁게 살아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강력한 도구였어요. 하여튼 전 어제도 책방까지 가는 내내 알록달록 자연이 내뿜는 천연 스펙트럼을 지휘하는 지휘자가 되었답니다. 딸에게 산책했노라고 말했더니, 바로 명령 하나 받았구요. ‘오늘부터 무조건 만보걷기 인증서 보내기. 아니면 벌금3000원. 모아서 여행 가자.’ 이젠 자식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나이가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한 삶입니다. 오늘도 온몸으로 자연의 샤워를 받는 당신이기를 바랍니다.

안도현 시인의 <논물 드는 5월에>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논물 드는 5월에 – 안도현(1961-현, 경북예천)


그 어디서 얼마만큼 참았다가 이제서야 저리 콸콸 오는가

마른 목에 칠성사이다 붓듯 오는가


저기 물길 좀 봐라

논으로 물이 들어가네

물의 새끼, 물의 손자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해방군같이 거침없이

총칼도 깃발도 없이 저 논을 다 점령하네

논은 엎드려 물을 받네


물을 받는, 저 논의 기쁨은 애써 영광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

출렁이며 까불지 않는 것

태연히 엎드려 제 등허리를 쓰다듬어주는 물의 손길을 서늘히 느끼는 것


부안 가는 직행버스 안에서 나도 좋아라

金萬傾 너른 들에 물이 든다고

누구한테 말해주어야 하나, 논이 물을 먹었다고

논물은 하늘한테도 구름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논둑한테도 경운기한테도 물을 먹여주네

방금 경운기 시동을 끄고 내린 그림자한테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저것 좀 보라고, 나는 몰라라


논물 드는 5월에

내 몸이 저 물 위에 뜨니, 나 또한 물방개 아닌가

소금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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