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봄날편지42

2023.5.30 류시화 <안개 속에 숨다>

by 박모니카

주황 발포비타민, 노란 우산과 야트막한 지붕, 초록 비자림, 하얀 파도깃털과 메밀꽃, 검은 화산돌, 비취 해안, 파란 하늘, 빨간 문주란, 남보라 벗의 셔츠...그리고 블루그레이 안개. 무채색 같은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여행은 잡을 수 있는 무지개빛 꿈자락 맞구나!’를 중얼거리는 저를 봅니다. 잠시 몸과 맘이 부산했던 시간들을 다 모아서 비바람을 몰고 오는 미지의 태풍 속에 던져주었습니다. 성난 포효를 절제할 줄 아는 검멀레 파도, 원시림의 장구한 인내를 보여준 비자림, 영화‘ 헤어질 결심’의 주제곡이 들려오는 황우치 안개. 책방처럼 따뜻한 이름의 봄날카페, 그리고 여행의 파고음계를 작곡해준 벗들. 이들이 있어서 다시 또 일상의 단색지붕에 다채로운 색을 입힐 에너지가 생겼습니다. 김용택 시인의 <연애시집>과 용돈을 건네며 저를 응원해준 인생의 짝꿍, 고맙습니다. ‘남는 건 사진 밖에 없어’라는 말로 열심히 사진사를 자처한 벗의 열정이 청춘같아서 부러웠습니다. 무엇보다 글을 쓰고 싶어하는 저의 가벼운 욕망에 작은 잉걸빛이 되어준 여행길, 스스로 만들어서 좋습니다. ‘찾으라, 움직여라, 가서보라. 또 다른 세상과 사람들을’ 두 발 성성할 때 종종 떠나야겠습니다. 이 나이가 되니 자꾸 움츠려드는 일이 많아져서 그나마 자연 속에 동화되면 마음이 편하니까요. 오늘과 내일, 오월을 정리하는 저는 할 일이 겁나게 쌓여있군요. 매거진 군산 기사를 포함한 몇 편의 글도 써야하고, 학생들 기말고사 준비도 시작해야 하고요. 며칠 전 부터 닫혔던 책방 문을 활짝 열어 쾌쾌한 습기도 물러나게 해야겠어요. 주인을 기다릴 책들, 화초들에게 얼른 인사도 하구요. 하루보다는 이틀이 더 좋은 오월의 마지막 버튼, 일상의 음계에 당신만의 색을 입혀보시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어제저녁 바다 안개 속에 서서 ‘저 안개빛은 무엇이 담고 있을까’를 생각하다 류시화 시인의 시 <물안개>라는 제목이 언뜻 떠올랐었는데, 오늘은 다른 시를 검색해보니 이 시도 있네요. <안개 속에 숨다>를 들려드립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안개 속에 숨다 – 류시화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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