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봄날편지104

2023.7.31 이성복 <그 여름의 끝>

by 박모니카

지금은 새벽 5시 30분. 어제와 같은 시간에 일어났는데도 왠지 모르게 어제 새벽보다 딱 한 뼘쯤 날이 짧아진 듯 보여요. 제가 기상 AI가 아니니 아마도 흐릿한 날씨탓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죠. 하지만 칠월의 종점인 오늘부터 부채꼴 퍼지듯 밤의 기운이 점점 스며 들거예요. 어젠 딸과 소풍을 갔답니다. 저를 위로하는 감자요리 제2탄 ‘카레라이스와 감자샌드위치’를 들고서요. 앞으로도 몇 건의 감자요리를 해주겠다고, 이제 감자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라는 주석까지 달고 가까운 서천의 문헌서원을 찾았어요. 요즘 가로수로 가장 많이 보이는 꽃은 단연코 ‘배롱나무 꽃’입니다. 말랭이마을 입구에도 한 그루 있는데요, 작년에 어느 지인이 보내준 배롱나무꽃 사진에 홀려서 이곳저곳을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고려시대 삼은 중 한 사람이 배향된 곳으로 가자. 문헌서원 배롱나무꽃 진짜 이쁘더라. 다 피었겠다.“

”삼은? 거 뭐,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그리고 한 사람 누구지? 잊었당. 하여튼 가자..“


학자 목은 이색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배향된 문헌서원은 가족 나들이에도 참 고즈녁한 풍경과 상서로운 기운이 있습니다. 갈 때마다 찾아오길 잘했다 싶은 맘이 절로 우러나는 곳이니까요. 서원 입구에 늘어서 있는 배롱나무꽃은 아직 만개하지 않아 꽃봉우리가 가득했지만 하늘을 담아 사진을 찍으면 진분홍빛 꽃잎들의 살랑거림이 진짜 간지럼을 느끼는 꽃잎처럼 떨리더군요. 함께 간 애완견 두 마리 산책시키며 이색 선생의 글도 띄엄띄엄 읽어주었습니다^^ 칠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저도 청포도 사랑 맛도 보고 그의 마지막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봐야겠습니다. 여름휴가를 맞으신 분들이 많으시죠. 어제 책방에 오신 가족의 남편분과 군산추억 이야기를 나누노라니, ‘당신 고향을 휴가지로 정하길 잘했네. 말랭이에 이런 책방도 있고, 당신과 생각코드가 비슷한 주인장과 나누는 대화도 좋고.’ 라며 책을 고르는 아내의 말에 남편의 어깨가 으쓱. 함께 온 가족들도 즐겁고 무엇보다 고향의 여러 소식을 듣게 되어서 좋은 시간이었다고 인사받았습니다. 휴가차 어디론가 가신다면 그곳의 책방 한 곳, 도서관 한 곳 정도는 일부러라도 찾는 여유를 가져보시길 권합니다. 사람이 아니라면 책을 통해서 새로운 인연하나 만들고 오시면 어떨까요.

오늘은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그 여름의 끝 – 이성복(1952-현, 경북상주)


그 여름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배롱나무1.jpg
배롱나무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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