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봄날편지120

2023.8.16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by 박모니카

정령치, 달굴, 뱀사골, 성삼재, 노고단... 이름만 보아도 어느 산인지 아시겠지요. 백두대간의 마지막에 있는 지리산(智異山, 1915m). 맑고 맑은 광복절, 잘 뚫린 도로 덕분에 정령치부터 성삼재까지 지리산의 둥근 볼 한쪽을 바람따라 한번 쓰루룩 만져주며 드라이브했어요. 대학 때 MT에서 노고단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너무 희미해서, 정말 가긴 갔었나 할 정도인데요, 사람들도 많이 와 있더군요. 지리산(智異山) 이름의 뜻은 ’다름을 아는 것, 차이를 아는 것‘이라 하지요. 워낙 명산이어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도 한데요. 옛날과 달리 차로 이동하니 머물러서 지혜를 얻을 마음도 시간도 갖지 않고 사는 무지하고 바쁜 현대인 중 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인증샷 찍으며 언제 다시한번 등산노선 중 하나라도 걸어봐야지 하는 맘을 놓고 왔습니다. 지리산의 10경이라는 풍경 중 하나라도 제 손으로 사진을 찍어 남겨놓고 싶거든요. 천왕봉일출, 피아골단풍, 노고단운해, 반야봉낙조, 불일폭포 등, 일생에서 단 한번의 풍경만 만나도 저절로 지혜를 얻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날이 올까요? 라는 소리가 제 안에서 들렸어요. 아이스크림에 라면하나 먹으면서 아주 조용히 ’할 수 있을거야‘라고 자문자답^^. 저녁에는 갈무리로 영화 <큰크리트유토피아>도 보았구요, 지진으로 인간지옥이 된 땅에 유일하게 하나 서 있는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군상들의 이야기, 볼만 했어요. 휴일이 하루 있으면 항상 혼동하는 나이인 듯, 일정부터 확인하고 편지글을 씁니다. 다시 같은 일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겠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모두 다른 얼굴일거예요. 우리도 그렇게 다름의 이치를 깨닫고 포용하는 하루 만드시게요. 지리산 정령치 주차장 비석에 써 있는 시,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1962-현, 경북문경)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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