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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봄날편지196

2023.11.6 김영언 <가을 포구에서>

by 박모니카

기도 중에 ‘오늘 하루는 고요하게’를 다짐하며 일요일을 보냈네요. 신기하게도 정말 고요하게, 비까지 내리니 책방을 찾는 사람도 거의 없었구요. 딱 한 팀, 대학생 3명이 설문지를 가지고 왔더군요. 알고보니 말랭이를 잘 아는 담당교수의 과제라고, 덕분에 마을을 찾았노라고 했어요. 설문지에 응답표를 하면서 갓 삶은 고구마로 대접했어요. 한 학생이 살며시 웃으며 묻더군요. ‘저도 글을 쓰고 싶어서 쓰고 나면 저장만 해 놓아요. 직업으로는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구요’ 왠지 그녀의 희망사항이 지금의 저와 비슷하지요. 너무 멋진 꿈이라고, 무조건 해보시라고 응원했더니, 금주 말랭이 축제 때 오고 싶다하더군요. 또 한번의 말랭이 홍보대사가 되었네요.. 그것도 고요히 앉아서요.^^ 말랭이 어머님들 자작시화전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그 중 한 분께서 암투병 중이예요. 그럼에도 2차항암치료 끝나고 잠시 마을에 왔다고, 전시회에 당신 그림도 내고 싶다고, 스테치북과 그동안의 수업 기록장을 놓고 가셨더군요.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이분의 애절함이 느껴졌어요. 이번에 시낭송도 못해서 많이 아쉬워하셨기에, 시화전만큼은 잘 만들어 드리겠다고 전화드렸습니다. 월요일이군요. 첫날은 왠지 마음이 서둘러지는데, 내리는 비 덕분인가요. 기상도 늦고, 편지도 늦고, 복실에게 아침안부도 늦네요. 오늘은 천천히 살아보시게요. 김영언시인의 <가을포구에서>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가을 포구에서 – 김영언

부슬부슬 내리는 한나절 가을비에

작은 포구가 비렁하게 젖고 있구나

잡다한 굴곡으로 드러나는 후미진 세월 저편

신기루처럼 뒷산 고개를 넘던 꽃상여의 그림자

한 서린 어머니의 마지막 표정 몇 가닥을 따라

친구의 유년을 온통 적셔대던 눈물

고향 떠나와 파도 속에 삼키며

철들 무렵

몇 톤 안강망으로 깊이 모를 바다를 떠돌고

그 어디쯤에서일까

샐 틈 없이 견고한 그물코를 물고

분노처럼 매달려 모르는 꽃게들의 행렬을 따라

바다의 한 끝을 물고

비좁은 포구의 기슭에 묶이머

야트막한 해안 절벽을

그 시절처럼 노모랗게 물들이고 있는

몇 포기 들국화 가냘픈 손길 아래

조금씩 마모되는 뱃머리로 잠시 누울 때

폐선 몇 척 무겁게 젖으며

그의 어깨처럼 기울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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