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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봄날편지204

2023.11.15 이순화 <나는 엄마의 우산>

by 박모니카


’등단’ 저는 이런 과정도 없이 제 맘대로 글쓰고 제 맘대로 책 만들어 ‘작가’라는 이름을 듣고 있으니, 어쩌면 책 출간하기 너무 좋은 세상에 태어나 너무 염치 없이 사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요즘 ‘신춘문예’ 공고를 보면서 해마다 이 산을 넘어 다른 산으로 가고자 하는 수많은 글쟁이들의 노고와 땀방울도 떠올려봅니다. <봄날의 산책>이름이 찍힌 첫 번째 동인시집 출간본 100여권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찾았는데요,,, 그분들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동동거리는 발걸음에 그대로 묻어나더군요. ‘첫 책‘속에 써 있는 자신들의 이름을 보는 그 미묘한 감정, 아마도 오랫동안 잊지못할거예요. 덕분에 저는 또 말할 수 없이 귀한 밥상을 받고 게다가 김치까지 덤으로 받아왔습니다. 이 정도 교환이면 세상살이 참 재미있지요. 어젯밤 수업을 끝내고 늦게 공모전 신청서하나를 썼습니다. ’2024말랭이입주작가공모신청서‘. 말랭이에서 2년동안 살고, 재 입주를 생각하며 같은 양식의 신청서를 작성했네요. 그 전 것과 비교해보니, 단지 살아온 이력에 대한 사진이 덧붙여져 페이지 수는 늘었더군요. 2년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행사를 했는지, 사진 수가 무려 기 천장 대. 그 중 20장 까지만 첨부할 수 있는데도, 제 맘대로 30여 장 냈습니다. 공모 합격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구요, 그만큼 추억하고자 하는 일이 많아서, 이 사진마저도 안 보이면 그 추억에 미안해서 그랬습니다. 규정을 어겼다고, 안 뽑아주면 말고요. ^^ 중요한 것은 지난 2년동안 말랭이에서의 삶을 사진으로 들여다보며 혼자서 웃고 또 웃는 평화로운 밤시간이었다는 거죠. 오늘은 날이 조금 풀어질까요. 아직도 도톰한 옷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햇살 한 가지 주워서 하루 종일 등에 대고 살랑거리고 싶은 날입니다. 동인지에 나온 많은 분 중에서 시인으로 등단한 이순화님의 <나는 엄마의 우산>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나는 엄마의 우산 – 이순화


감꽃이 떨어지는 사립문 앞에서

실에 꿰어 목에 걸고 놀았다

뒤안장독대 옆 대나무숲에 참새가

새끼를 떨어뜨리고 짹짹거리면

대나무를 타고 올라가 둥지에 올려주었다

장독 옆에는 백련초가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봉숭아 꽃물을 들였다

눈이 오던 날 아버지는 천국 여행을 떠나셨다

하늘이 파란 날 꽃상여는 훨훨 춤을 추면서

들판을 돌아 산으로 가고 있었다


엄마는 늘 큰소리를 치면서 일을 했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집안일을 시켰다

가마니 짤 때 밥 먹여라, 돼지 밥 주었냐

왕골 짜개기, 누에 밥 주기, 소 풀 뜯기기

나무 해오기, 떡갈나무 잎 따기

여름이면 샘물 떠나르기, 애기보기

해지기 전에 보리쌀 씻기


똥 장군도 지라면 질 수 있었다

손가락 관절이 튀어나오고

다리가 오자로 휘어져 가고 있었다

우리 딸이 동네에서 으뜸이여

웃음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내 머리는 흰 꽃이 피었다

나는 우리 엄마를 웃게 하고

형제들을 거두었다

엄마의 우산이 되어 살아온 시간이

이것이 인생인가 묻고 싶다

장마가 끝난 뒤 온 세상이 초록이다

만지면 물이 들 것 같다

매일 폭염주의보가 발효 중이다

누구의 우산이 아닌 꽃무늬 양산을 쓰고

푸르른 세상을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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