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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봄날편지267

2024.1.11 천양희 <어때>

by 박모니카

<장자> 외물편에서 혜시와 장자와의 대화가 써 있어요. “그대의 말은 쓸모가 없네”라고 하자,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함께 쓸모에 관해 말할 수 있네”라고 장자가 말하죠. 소위 장자의 ‘무용(無用)이 유용(有用)’하다는 철학입니다. 책방에 놓인 철학자 강신주의 <장자수업>을 간간히 읽고 있는데, 동영상으로도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참 재밌습니다. 쓸모없는 것이 진정으로 쓸모있는 것이라니요... 생각해보면 저만 해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하루 일을 시작하지요. 혹여나 그렇게 살지 않으면 제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것은 아닐까, 또 남이 나를 무시하진 않을까 하는 미혹한 마음이 있기도 해서요. 읽다보니 다음 글에서 눈과 귀가 번쩍였습니다. ‘세상이 넓고 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에게 쓸모가 있는 것은 발을 디딜 만큼의 땅이네.’ 라는 부분요. 결국 내가 딛은 발 만큼의 땅을 제외한 나머지 땅들이 쓸모없는 땅. 그런데 그 땅이 없다면 얼마나 매 순간 위태로운 삶을 살아갈까요. 그 한 발을 떼기가 두려울테니까요. 사람도 사랑도 그런 것 같아요. 누군가가 무언가를 해주는 쓸모가 있어야만 사랑한다면, 또 사랑받는다면 너무도 슬픈 일 입니다. 우리 모두는 슬퍼하고 불행해지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가니까요. 장자의 <무용(無用)>이란 말 한마디로 고전이 주는 지혜를 한 국자 떠서 마셔보는 새벽입니다. 오늘은 천양희 시인의 <어때>입니다. 봄날의산책 모니카


어때 – 천양희


참나무 아니고 잡나무면 어때

정상 아니고 바닥이면 어때

고산 아니고 야산이면 어때

물소리 아니고 물결이면 어때

보름달 아니고 그믐달이면 어때

상록수 아니고 낙엽이면 어때

강 아니고 개울이면 어때

꽃 아니고 풀이면 어때

이곳 아니고 저곳이면 어때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러면 어때 저러면 어때


기쁨으로 술렁대고

슬픔으로 수런거릴 때

푸른 나무와 향기로운 풀이

꽃 피는 시절보다 나으면 또 어때

수 천장의 LP판이 있는 뮤직박스. 이제는 찾는 사람이 없다네요. 저 귀한 음악들이 다시 살아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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