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무의미해도 되는 시간 2

- 나의 시간

by AI적허용

조금은 무의미해도 되는 시간 2

- 나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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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우리는 자연을 잃고, 자연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을 자주 보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연 안에 오래 머무는 시간이 사라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지만, 구름의 움직임을 끝까지 따라가지는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체감만 하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방식까지는 보지 않는다. 비는 풍경이 아니라 불편함이나 일정 조정의 이유가 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구름과 바람과 나뭇가지와 비에는 공통점이 있다.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같은 순간은 없다. 어느 정도의 리듬과 방향성은 있지만, 그 안의 세부는 매번 달라진다. 그래서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오래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의미를 이해하지 않아도 되고, 결론을 내릴 필요도 없다. 그냥 보고 있으면 된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던 시간은 바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거시적으로는 안정적이고, 미시적으로는 계속 변하는 패턴. 이 패턴은 주의를 붙잡지만, 주체를 호출하지는 않는다. 판단하지 않아도 되고,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이 시간은 편안했다.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이런 리듬 속에서 살아왔다.


자연을 잃은 뒤에도, 이 리듬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는 자연 대신 화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쇼츠와 릴스, 짧은 영상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길이는 비슷하고, 구조도 닮아 있지만, 내용은 매번 다르다.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이 구조는 놀랍도록 자연과 닮아 있다. 반복되지만 같지 않고, 예측 불가능하지만 불안하지 않다. 깊이 이해하지 않아도 되고,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보고 있다가 멈춰도 되고, 멈췄다가 다시 이어도 된다. 주체로서의 나를 강하게 부르지 않는 시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시간을 찾는다. 웃기지도 않고, 감동적이지도 않은데도 화면을 넘긴다. 이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무의미한 것을 좋아해서도 아니다. 자연이 사라진 자리에, 자연이 작동하던 방식을 최소한으로라도 재현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이렇게 보면, 이 행동을 쉽게 비난할 수는 없다. 이는 퇴행이 아니라 적응이다. 인간의 인식이 과도한 주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낸 임시적인 생태계다. 진짜 숲은 아니지만, 숲의 리듬을 흉내 낸 공간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자연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지만, 화면은 아주 조금씩 주의를 요구한다. 자연은 완전히 놓아주지만, 화면은 끝까지 놓아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시간은 충분히 회복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시간을 반복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만큼 자연의 시간이, 우리의 일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을 잃었지만, 자연의 구조까지 잊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른 형태로라도 그것을 불러온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이 행동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해석은, 다음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간을 정말로 필요로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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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이건 나약함이 아니라 본능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조금 탓하게 된다.


왜 이렇게 멍해지는 걸 좋아하는지, 왜 의미 없는 화면 앞에 오래 머무는지, 왜 가만히 있는 시간을 제대로 견디지 못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이 감정을 나약함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시간의 형태를 떠올려보면, 답은 조금 선명해진다. 인류의 대부분의 시간은, 극단적인 위기 속에서가 아니라 비교적 안정적인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늘 사냥을 하거나 도망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위협이 당장 닥치지 않고, 굶주림이 지금 이 순간의 문제가 아니며, 완전히 혼자가 아닌 상태. 그 시간들이 훨씬 길었다.


그때의 인간은 자연 속에 있었다. 포식자의 눈앞에 있지 않았고, 집단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몸은 쉴 수 있었고, 신경은 과도하게 긴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상태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신호였다. 몸과 인식은 이 시간을 ‘정상’으로 학습했다.


주체적 성취는 분명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냥을 하고, 도구를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이 성취의 시간은 언제나 에너지 소모가 큰 행동이었다. 실패의 위험이 있었고, 집중과 긴장을 요구했다. 그래서 이 모드는 짧게 작동하고, 끝나면 내려와야 했다.


반면 자연의 시간은 다르다. 이 시간에는 증명할 것이 없고, 경쟁할 대상도 없다. 특별히 잘 해낼 필요도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통과하면 된다. 이 상태에서 몸은 회복하고, 신경은 안정되고, 경험은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진화적으로 보면, 이 시간이 훨씬 더 기본값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 이 시간을 찾는다. 주체로서의 하루가 길어질수록, 본능은 더 강하게 이 신호를 요구한다. 안전하고, 위협이 없고,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이 욕구는 게으름이 아니라 생존 시스템의 일부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혐오는 조금 내려놓아도 된다. 이불속에서 멍해지는 자신을 실패로 규정할 필요도 없다. 그건 포기나 퇴행이 아니라, 오래된 설계가 보내는 신호에 가깝다. 너무 오랫동안 주체로만 살아왔다는 몸의 알림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건,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본능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차분히 바라보는 일이다. 우리는 나약해진 게 아니라, **너무 오래 본능을 무시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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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자연을 찾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여러 방식으로 자연을 찾고 있다.


거창한 결심을 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들이 있다.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어느새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이 산으로 떠나는 이유도 비슷하다. 꼭 등산을 잘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성취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숲길을 걷다 보면, 특별한 목표 없이 발을 옮기는 시간이 생긴다.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보고,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발밑의 감촉을 느낀다. 이때 우리는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기보다, 그 공간에 놓여 있다. 주체로서의 나보다는, 환경 속의 한 존재로 돌아간다.


일상 속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특별히 생각하려는 것도 아닌데, 시선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향한다. 지나가는 구름이나 흔들리는 나뭇잎,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소리들을 그냥 따라간다. 그 시간에는 질문이 줄어들고, 판단도 느슨해진다. 몇 분에 불과할지라도, 몸은 그 틈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리고 자연이 쉽게 닿지 않는 순간에는, 화면을 통해서라도 이 리듬을 찾는다. 쇼츠나 릴스를 넘기며 반복되는 패턴을 바라보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내용이 중요하지 않은데도 계속 보게 되는 건, 그 안에 예측 불가능하지만 안전한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직접 마주하지는 못하지만, 자연이 주던 구조를 대신 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행동은 일관되어 있다. 장소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찾고 있는 것은 같다. 위협이 없고, 굶주릴 걱정이 없고, 혼자가 아닌 상태에서 흘러가는 시간. 주체가 잠시 물러나도 괜찮은 시간이다.


그래서 이 장면들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다. 산을 찾는 마음도,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도, 화면 앞에서 멍해지는 습관도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자연의 시간으로 돌아갈 길을 찾고 있다.


이 생각에 닿는 순간, 마음은 조금 내려앉는다. 문제가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구조에 있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해는, 다음 질문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간을, 앞으로 더 자주 허락해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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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진짜 자연의 시간은 무엇을 회복시킬까



이쯤 오면,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찾아 헤매는 이 자연의 시간은, 도대체 무엇을 회복시켜 주는 걸까. 휴식을 넘어, 회복을 넘어,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 걸까.


진짜 자연의 시간은 성취를 회복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성취에서 잠시 떨어져 있게 해 준다. 잘하고 있는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뒤처지지는 않았는지를 묻지 않는다. 자연 앞에서는 누구도 성과를 요구받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된다.


이 시간이 회복시키는 것은 ‘존재’다. 내가 무엇을 해냈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여기 있어도 되는 상태. 그 감각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성취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만, 존재는 사람을 붙잡아 준다. 오래 버티게 만드는 힘은 대개 후자 쪽에 있다.


자연의 시간은 자존감도 회복시키지 않는다. 대신 안정감을 회복시킨다. 자존감은 언제나 비교와 평가를 동반한다. 잘하고 있는 나, 괜찮은 나, 부족하지 않은 나를 확인해야 유지된다. 반면 안정은 조건이 없다. 지금의 내가 충분한지 따지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괜찮다고 느끼는 상태다.


숲에 있거나, 바람을 맞거나, 비 오는 소리를 듣고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칭찬하지 않는다. 잘 살아왔다고 증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긴장이 풀리고, 호흡이 깊어진다. 자연의 시간은 이렇게, 평가를 거치지 않는 안정을 돌려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의 시간은 의미를 잠시 내려놓게 한다. 우리는 평소 너무 많은 의미를 생산하며 산다. 이 경험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이 시간이 어떤 가치로 남을지 끊임없이 계산한다. 그 과정에서 숨이 막힌다.


자연의 시간에는 그런 계산이 없다. 비는 의미를 주지 않고, 구름은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간다. 그 앞에 서 있으면, 나 역시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된다. 이 여백이 생길 때, 비로소 숨이 트인다.


그래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다. 쉼의 기술도 아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았던 상태**, 설명하지 않아도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감각이다. 자연의 시간은 그 감각을 가장 무리 없이 되돌려준다.


이걸 깨닫는 순간, 삶의 피로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조금 분명해진다. 우리는 너무 오래, 존재를 증명하려 애써왔다. 성취로, 의미로, 자존감으로 자신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건, 그 이전의 안정이었다.


자연의 시간은 우리에게 묻지 않는다.

“그래서, 넌 뭐가 되었니?”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

아마 우리가 정말로 그리워하는 건, 바로 이 한 문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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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나의 시간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아주 단순해진다.

이 모든 이야기를 지나온 뒤에, 나는 나에게 어떤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은가 하는 질문이다.


완벽한 자연일 필요는 없다. 깊은 산속이나 넓은 바다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상태다. 주체로서의 내가 잠시 물러나도 되는 시간,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아주 짧아도 된다. 몇 시간이나 하루 전체일 필요는 없다. 몇 분이어도 괜찮고, 하루에 한 번이 아니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이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창밖을 잠시 바라보는 순간일 수도 있고, 아무 음악도 틀지 않은 채 걷는 짧은 거리일 수도 있다.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앉아 있는 몇 분일 수도 있다. 그 시간에 무엇을 느꼈는지, 잘 쉬었는지, 의미가 있었는지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된다.


이 시간은 목표가 아니다. 실천해야 할 과제도 아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선언으로 끝낼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글이 남기고 싶은 건 방법이 아니라 방향이다.


주체가 아닌 상태로 잠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그게 나약함이 아니라 오래된 본능이라는 이해다. 이걸 알고 나면, 우리는 조금 덜 자신을 몰아붙이게 된다. 가만히 있는 순간을 실패로 규정하지 않게 된다.


어쩌면, 이 시간은 스스로에게 주는 가장 소박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더 잘 살기 위한 선물도 아니고, 더 나아지기 위한 투자도 아니다. 그냥 지금의 나에게 허락해 주는 시간이다.


오늘 하루가 끝나갈 때, 아주 잠깐이라도 그런 시간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간, 주체가 아니어도 괜찮았던 시간. 그 한 조각이, 내일의 나를 조금 덜 무겁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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