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무의미해도 되는 시간 1

- 자연의 시간

by AI적허용

조금은 무의미해도 되는 시간 1

- 자연의 시간


---


## 1. 오후 두 시의 공백



오후 두 시다.


점심은 이미 끝났고,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해야 할 일은 오전에 마무리했고, 다음 일정은 멀리 있다. 달력에도, 알림에도, 당장 나를 부르는 것은 없다. 그래서 조금 어색하다. 이렇게 비어 있는 시간이 하루에 있었나 싶다.


이 시간에 나는 보통 무언가를 찾는다. 해야 할 일을 하나 더 만들어내거나, 의미 있는 일을 떠올리거나, 최소한 시간을 잘 쓰고 있다는 증거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간에 나는 뭘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오히려 상황과 어긋나 보인다.


창밖을 본다. 비가 온다. 많이 내리는 비는 아니고, 그렇다고 멈출 기미도 없다. 마당의 흙은 조금씩 색이 짙어지고, 물웅덩이는 생겼다가 사라진다. 구름은 느리게 움직이고, 그 모양은 계속 바뀐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나뭇잎들이 동시에 흔들렸다가,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만해진다.


이 장면에는 분명 반복이 있다. 하지만 같은 순간은 없다. 방금 본 구름과 지금의 구름은 닮아 있지만 같지 않고, 방금 불던 바람과 지금의 바람도 비슷할 뿐이다. 나는 이걸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보고 있는 상태로 충분하다.


이상하게도, 이 시간에는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지 않았는데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몸과 생각이 조금 느슨해진다. 무엇을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도 없고, 지금의 상태를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냥 여기 있어도 되는 것 같다.


문득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이런 시간이 더 자연스러웠다. 오후 두 시쯤이면 일을 잠시 멈추고, 마루에 앉아 있거나, 괜히 동네를 한 바퀴 돌거나, 이웃집에 잠깐 들르기도 했다.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 살아 있는지 확인하듯 얼굴을 보고, 날씨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고, 말이 없어지면 그대로 앉아 있기도 했다.


그때는 이 시간이 문제 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뭘 해야 하느냐는 질문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할 일이 없다는 건 이상한 상태가 아니라, 하루의 한 부분이었다. 비어 있는 시간은 채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나가게 두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다르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순간이 오면, 오히려 불안해진다.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한다. 이 시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지 미리 정해두고 싶어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화면을 켜고, 무언가를 소비하고, 생각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한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점점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렇게 오후 두 시의 공백에 잠시 머물러 보면, 다른 감각이 올라온다.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주체로서 무언가를 해내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성취하지 않아도 되고, 발전하지 않아도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다. 그저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상태다.


이 글은 아마 여기서 시작한다.


무언가를 하자는 제안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오후 두 시의 공백은 그렇게, 우리를 지금의 시간 감각에서 살짝 밀어낸다. 그리고 그 틈에서, 아주 오래된 리듬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


## 2. 아무것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있었다



예전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손을 놓고 누워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시간을 밀어내지 않았고, 시간을 채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시간 안에 있었다.


마루에 앉아 비를 보는 사람을 떠올려본다. 그는 비를 분석하지 않는다. 언제쯤 그칠지 계산하지도 않고, 이 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지도 않는다. 빗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지는 걸 듣고, 바람이 방향을 바꾸면 고개를 조금 돌린다. 그게 전부다. 그 시간에 그는 ‘보고 있는 사람’이지,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런 오후에는 마실을 나가기도 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누굴 만나야겠다고 결심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 집 앞을 지나가다 보면, 문이 열려 있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한 번 들여다보는 정도다. 손에 든 것도 대단하지 않다. 마당에서 딴 오이 하나, 남은 떡 한 조각,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없이 간다.


마실은 방문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깝다. 잘 지내는지, 오늘도 무사한지, 크게 달라진 건 없는지. 그걸 묻지 않아도 얼굴을 보면 대충 안다. 그래서 대화는 짧다. “비가 오네.” “그러게.” 그 말 뒤에 더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말이 없다고 해서 어색하지 않다.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공유된 상태다.


이 관계에는 설명이 없다. 왜 왔는지도, 언제 갈 건지도 명확하지 않다. 조금 앉아 있다가, 비가 잦아들면 일어난다. 더 머물러도 되고, 바로 가도 된다. 누구도 그 선택을 평가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시간에 사람이 사람을 봤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시간들은 게으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생산성이 없다고 해서 문제 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가 그렇게 흘러가는 한 구간이었다. 일을 하는 시간과 일을 하지 않는 시간 사이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끼어 있었다. 그 시간은 따로 이름 붙일 필요조차 없었다.


지금의 감각으로 보면, 이 장면들은 조금 느슨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비정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간이 빠지면 하루가 어딘가 불안해졌다. 너무 바쁘거나, 너무 조용하면, 사람들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 리듬을 몸이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던 사람들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들은 **주체가 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선택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 상태로, 잠시 세계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덕분에, 다시 일을 할 수 있었고, 다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보면, 그 시간은 특별한 여유가 아니라 정상적인 리듬이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부지런함이 아니라,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간의 위치다. 그 자리가 사라진 뒤부터, 우리는 쉬고 있어도 어딘가 쫓기고 있는 기분을 떨치지 못한다.


---


## 3. 우리는 언제부터 하루 종일 주체가 되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하루가 시작되면, 바로 내가 등장한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선택이 따라붙는다. 무엇을 먼저 할지, 어떤 순서로 움직일지, 지금 이 시간이 괜찮은지 아닌지를 계속 판단한다. 하루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거의 쉬지 않고 호출된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하루 종일 주체가 되었을까.


예전에도 선택은 있었다. 판단도 있었고, 책임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필요한 순간에만 잠깐 작동했다. 지금처럼 하루 전체를 덮지는 않았다. 주체는 상황에 맞게 나타났다가, 일이 끝나면 물러났다.


지금은 다르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도 주체는 쉬지 않는다. 쉬는 시간마저 계획해야 하고, 휴식에도 기준이 붙는다. 이 시간을 잘 쓰고 있는지, 이 선택이 나중에 도움이 되는지, 의미 있는 경험인지 아닌지를 계속 따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는 곧바로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진다. 몸은 쉬고 있는데, 머리는 쉬지 못한다. 이 시간이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담이 된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고, 뒤처지고 있는 것 같고, 설명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서다.


이 불안은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다. 하루의 구조가 그렇게 바뀌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선택지 앞에 서고, 그만큼 더 자주 판단해야 한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 되어버린다. 주체로 있지 않으면, 곧바로 무책임해 보이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하루에는 더 이상 빈칸이 남지 않는다. 일이 없으면 자기 계발을 하고, 그것도 없으면 취향을 관리하고, 그마저도 없으면 정보를 소비한다. 무엇이든 좋으니, 이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만은 피하려 한다.


문제는,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는 데 있다. 주체로 사는 일은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판단과 선택은 생각보다 무거운 작업이다. 원래는 집중해서 쓰고, 다시 내려놓아야 하는 기능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기능을 하루 종일 켜둔 채로 산다.


그래서 피로가 쌓인다.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계속 나로 있어야 해서**다. 쉬고 있는데도 쉬지 못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주체로서의 나는 여전히 근무 중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나를 부르고 있다.


이쯤에서 질문이 생긴다.


정말 하루의 모든 순간에서, 우리는 주체여야 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마저 선택과 의미로 채워야 할까. 이 질문은 게으름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주체로 살아온 삶이, 우리에게 과부하를 주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그 상태를 오래 연습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체가 아닌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 자리는 다른 것들로 대체되었다. 그래서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동시에 낯설어한다.


---


## 4. 주체적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주체적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라고.


이 말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시간을 뜻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이 시간에는 내가 잠시 전면에 나오지 않는다. 선택하는 나, 판단하는 나, 설명하는 내가 한 발 물러난다. 그 자리에 다른 감각이 들어온다.


이 시간은 흔히 말하는 휴식과도 다르다. 휴식은 보통 계획된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쉴지 정하고, 무엇을 하며 쉴지도 고른다. 잘 쉬었는지, 충분히 회복했는지도 나중에 평가한다. 휴식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주체로 남아 있다.


회복과도 다르다. 회복은 목표를 가진다. 피로를 줄이고, 에너지를 채우고, 다시 잘 움직이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회복은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여전히 방향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간이다.


주체적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는 그런 방향이 없다. 이 시간이 끝나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전제도 없다. 잘 보내야 할 이유도, 잘 보냈다는 증거도 필요 없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 상태로 있어도 충분하다.


이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뭔가를 느끼지 않아도 되고, 깨달음을 얻지 않아도 된다. 생각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두고, 아무 생각이 없으면 없는 채로 둔다. 이 시간은 나에게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간은 아주 조용하다. 외부의 요구도 줄어들고, 내부의 명령도 느슨해진다. 주체가 물러나면, 세계가 조금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비가 오는 소리, 창밖의 움직임, 몸의 무게 같은 것들이 다시 느껴진다. 의미가 아니라 상태로 들어오는 감각들이다.


이런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만 너무 오래 사용하지 않아서 잊고 있었을 뿐이다. 마루에 앉아 있던 오후, 별일 없이 지나가던 시간, 목적 없이 들르던 방문들 속에 이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야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개념을 처음 들으면, 이상하게도 새롭기보다는 익숙하다. “아, 이런 게 있었지”라는 반응이 먼저 나온다. 완전히 처음 접하는 생각이 아니라, 한동안 쓰지 않던 감각을 다시 떠올리는 느낌에 가깝다.


주체적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도피가 아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주체로만 살아온 삶에, 잠시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내어주는 일이다. 이 여백이 있어야, 주체로서의 시간도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


## 5. 잠들기 전, 이불속의 스마트폰



이렇게 생각을 따라오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장면에 닿는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매일 밤 겪고 있을 장면이다.


잠들기 전, 이불속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웃긴 영상을 찾는 것도 아니고, 감동적인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도 못한다. 화면은 계속 바뀌고, 손가락은 별다른 의식 없이 위로 움직인다. 보고는 있지만, 깊이 보고 있지는 않다. 생각은 반쯤 비워진 상태다.


이 시간이 이상하게 편안하다. 하루 종일 선택하고 판단하느라 바빴던 머리가, 잠시 느슨해진다. 무엇을 이해해야 할 필요도 없고, 의미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다. 이 장면이 나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지 따지지 않아도 된다. 그저 흘러가는 패턴을 따라가면 된다.


그런데 이 장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단순한 습관으로 치부하기 어려워진다. 즐겁지도 않은데 왜 멈추지 못하는지, 행복하지도 않은데 왜 계속 보고 있는지 묻게 된다. 의지가 약해서도 아니고, 절제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이 시간에는 다른 기능이 숨어 있다.


이불속은 외부의 요구가 가장 적은 공간이다. 이제 누구도 나에게 결정을 요구하지 않고, 성과를 묻지 않는다. 내일의 일정은 잠시 미뤄두어도 된다. 그 안에서 스마트폰 화면은 반복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크게 위험하지도 않다.


이 상태는 어딘가 익숙하다. 마루에 앉아 비를 보던 시간, 바람이 지나가는 걸 멍하니 느끼던 오후와 닮아 있다. 반복되지만 같지 않고, 주의를 붙잡지만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 구조다. 자연을 직접 마주하지는 못하지만, 자연이 주던 리듬을 어렴풋이 흉내 내고 있다.


그래서 이 시간을 완전히 비난하기는 어렵다. 이건 쾌락을 탐닉하는 장면이라기보다, **주체로서의 하루를 잠시 내려놓으려는 시도**에 가깝다. 하루를 끝내기 전에, 최소한 몇 분이라도 주체적이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머물고 싶다는 몸의 신호다.


다만 이 방식이 완벽한 해답은 아니다. 화면은 계속 주의를 붙잡고 있고, 완전히 놓아지지는 않는다. 쉬고 있는 것 같지만, 깊이 쉬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이 반복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만큼, 주체적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우리 삶에서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아주 작은 형태로나마 그 시간을 찾아내고 있다. 이불속의 스마트폰이라는 가장 사적인 방식으로, 자연의 시간을 흉내 내며 버티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임시적인 대체물 말고, 정말로 **조금 무의미해도 되는 시간**을 삶 안에 다시 놓을 수 있을까.


---

작가의 이전글조금은 무의미해도 되는 시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