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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력 언어는 언제나 비쌌다
우리는 흔히 표현의 문제를 재능의 문제로 생각한다. 누군가는 말이 되고, 누군가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래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아직 준비가 안 됐다”거나 “더 배워야 한다”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이 설명은 어딘가 계속 걸린다. 정말로 문제는 재능이었을까, 아니면 애초에 말할 수 있는 자리가 너무 비싸게 설계돼 있었던 건 아닐까.
사회를 조금만 멀리서 보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늘 제한돼 있었다. 사회는 제도를 만들고, 제도는 고유한 언어를 만든다. 그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로 사고하고, 그 언어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만이 비로소 미디어를 통해 발언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이전에, 말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승인되어야 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시간과 교육, 경제적 여유, 그리고 무엇보다 제도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특정한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말은 곧바로 미숙하거나 비논리적인 것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많은 감각은 애초에 말이 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이렇게 보면 표현의 문제는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접근 비용의 문제에 가깝다. 감각이 없어서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감각을 통과시킬 수 있는 언어와 형식이 지나치게 비쌌던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비용을 당연한 통과 의례처럼 받아들여 왔다. 말하고 싶다면, 먼저 그만큼의 값을 치러야 한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과연 그 비용은 언제나 필요했던 것일까. 이 질문에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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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I 이후, 지성 언어의 병목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오래된 구조에 균열을 낸 것이 AI의 등장이다. AI는 고급 지성 언어의 장벽을 분명히 낮췄다. 이전에는 논리적으로 정제된 문장을 직접 만들어낼 수 있어야만 사회적 언어에 접근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설명만 할 수 있다면 그 설명을 정돈된 언어로 옮겨주는 도구가 생겼다. 말하자면 “설명만 할 수 있다면”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이 변화는 분명히 크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글의 형태로 외부에 내놓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글쓰기 훈련을 받지 않았어도, 개념을 완벽히 다듬지 못했어도, 일단 말해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표현의 병목은 실제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이 변화는 정말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가. AI에게 설명을 맡기기 위해서조차, 우리는 여전히 ‘설명 가능한 언어’를 갖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상태를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하고, 원인과 결과를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지성 언어의 비용은 낮아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는 넓어졌지만, 여전히 어떤 감각들은 그 문턱 앞에서 멈춰 선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AI 이후에도 말은 늘었지만 어떤 감각들은 여전히 말이 되지 못한다. 특히 지금처럼 사회 전체가 불안정한 과도기에 들어서면, 설명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감각들이 있다. 이 감각들은 아직 개념으로 정리되지 않았고, 그래서 설명하려는 순간 쉽게 흐트러진다. 여기서 다시 병목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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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럼에도 남아 있던 서사 표현의 병목
이 병목은 단순히 개인의 언어 능력 문제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 서사의 구조와 더 깊이 연결되어 있다. 왜 우리는 지금의 상태를 설명하는 이야기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가. 왜 기존의 서사는 늘 한 박자 늦게 도착하는가.
한 가지 이유는 작가들의 창작 관성에 있다. 대부분의 서사는 반복을 통해 만들어진다. 성공했던 형식, 안전했던 결말, 이미 승인받은 감정선이 다시 호출된다. 이 관성은 개인의 나태함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시스템의 결과다. 위험하지 않은 이야기가 더 빨리 통과되고,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 결과, 서사는 자주 희망 포르노의 형태로 수렴한다. 노력하면 보상받고, 고통은 성장으로 환원되며, 마지막에는 어떤 형태로든 의미가 회복된다. 이 구조는 오랫동안 유효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과는 점점 어긋나기 시작한다. 노력과 보상이 연결되지 않는 감각, 설명되지 않는 불안, 희망을 믿고 싶지만 더 이상 설득되지 않는 상태는 이 서사 안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 간극은 매체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TV나 OTT에서는 여전히 정제된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반면, 숏폼에서는 전혀 다른 감각이 튀어나온다. 설명되지 않은 채 던져지는 장면, 결론 없이 끝나는 아이러니, 웃긴데 불편한 상황들. 이 짧은 영상들을 보며 우리는 때때로 전율을 느낀다.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지금의 감각과 정확히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전율은 기존 서사가 실패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완성된 설명보다, 설명되지 않은 상태 자체를 공유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감각은 숏폼의 속도 안에서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여전히 그 감각을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구조적으로 붙잡을 수 있는 형식은 부족하다. 그래서 서사 표현의 병목은 형태를 바꾼 채 남아 있다. 말은 늘었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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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표현의 병목은 ‘말을 못 해서’가 아니라 ‘형식이 없어서’였다
여기서 질문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표현의 병목을 주로 언어 능력의 문제로 설명해 왔다. 말을 잘 못해서, 개념을 정리하지 못해서, 지성이 부족해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흐름을 다시 되짚어보면, 이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정말로 문제는 ‘말을 못 하는 것’이었을까.
지성 언어는 분명 강력한 도구다. 개념을 분해하고, 원인과 결과를 정리하며, 사회적으로 합의된 의미를 빠르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 지성 언어는 설명을 요구하고, 설명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거리 두기를 전제로 한다. 감각을 한 번 떼어내 개념으로 만들고, 다시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구조다. 감각 → 설명 → 공유라는 이 경로는 안정적이지만, 비용이 크고, 무엇보다 감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쉽게 작동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자주 마주하는 감각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걸린다. 노력과 보상이 어긋난다는 느낌,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설명되지 않는 허탈감, 희망을 말하려는 순간 어딘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감정들. 이런 것들은 설명하려는 순간 쉽게 납작해지거나, 말하는 사람 스스로도 확신을 잃는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말문이 막힌다. 그러나 이 침묵은 지성의 부재라기보다, 통과할 형식이 없다는 신호에 가깝다.
여기서 예술과 스토리는 다른 역할을 한다. 스토리는 논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개념 정의를 선행하지도 않는다. 대신 상황과 행동, 어긋난 결과와 아이러니를 그대로 배열한다. 독자는 그것을 ‘이해’하기보다 ‘겪는다’. 그래서 스토리는 지성 언어보다 먼저 감각에 도달한다. 설명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형식, 말이 되지 않아도 공유되는 구조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보면 표현의 병목은 언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형식의 문제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어떤 감각은 설명을 거쳐야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거치지 말아야 비로소 살아남는다. 지성 언어의 차로만 열려 있던 사회에서, 많은 감각들이 그 입구에서 탈락해 왔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작업을 잠깐 언급하고 싶다. 필자는 현재 스토리 창작 엔진을 개발 중에 있다. 이 작업은 창작을 자동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감각이 설명으로 오염되기 전에 서사의 형식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경로를 실험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 시도가 의미를 갖는 이유는 단순하다. 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말할 형식이 없어서 사라졌던 감각들이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형식을 다시 설계해 볼 수 있는 조건이 처음으로 갖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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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도권을 넘지 않아도, 표현할 언어가 생겼다
그렇다면 한 가지를 묻게 된다. 제도권 미디어는 무엇을 표현하지 못해 왔을까. 표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특정 매체나 창작자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어떤 조건 속에서 말해왔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질문이다.
제도권 미디어는 기본적으로 안정성을 전제로 작동한다. 이해 가능한 이야기, 설명 가능한 감정, 합의 가능한 결론이 요구된다. 이 구조 안에서는 이미 이름 붙여진 문제, 이미 서사화된 고통만이 반복해서 호출된다. 반면 과도기에서 실제로 사람들을 붙잡는 감각들은 아직 이름이 없다. 설명하려 하면 미끄러지고, 정리하려 하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상태들이다.
예를 들어 이런 감각들이다. 노력과 보상이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다는 느낌,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계속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 능력주의가 더 이상 공정하게 느껴지지 않는 피로감. 희망을 말하는 이야기들을 접할수록 오히려 공허해지는 감정, 웃고 넘기려 해도 계속 남는 설명되지 않는 아이러니. 이 감각들은 분명히 널리 공유되고 있지만, 제도권의 언어로는 쉽게 다뤄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 감각들은 결론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교훈으로 정리되지 않고, 성장 서사로 환원되지 않으며, 책임의 주체도 명확하지 않다. 제도권 미디어는 이러한 상태를 오래 붙잡기 어렵다.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것은 위험하고, 불안정하며, 때로는 무책임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감각들은 늘 한 박자 뒤에야 등장했다. 문제가 충분히 커지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해석이 생긴 이후에야 비평이나 회고의 형태로 호출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건이 달라졌다. 제도권을 통과하지 않아도, 표현할 언어가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형식들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를 그대로 두고, 결론을 유예하며, 불편한 상태 자체를 공유할 수 있는 경로가 열렸다. 이 언어는 제도권의 언어보다 덜 정제되어 있지만, 그만큼 지금의 감각과 더 직접적으로 닿는다.
이 변화는 제도권의 실패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회가 자기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이 하나 더 생겼다는 뜻에 가깝다. 사후적으로만 말해왔던 감각들이, 이제는 동시대의 언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 감각들이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말이 되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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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감각자 = 창작자가 되어도 되는 조건
오랫동안 우리는 창작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로가 있다고 믿어왔다. 긴 훈련과 반복 학습, 선배의 문장을 닮아가는 시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오염과 복제의 단계들이다. 이 경로는 창작자를 길러내는 데 분명 일정한 역할을 해왔다. 언어를 다루는 기술을 익히고, 기존 서사의 구조를 이해하며, 무엇이 통과되고 무엇이 배제되는지를 몸으로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언제나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감각자에게 동일하게 요구되어야 할 조건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훈련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시대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각하고 있었고, 그 감각은 배움을 통해 날카로워지기보다 오히려 무뎌지는 경우도 많았다. 자신의 언어를 갖기 전에 타인의 언어를 너무 많이 통과하면서, 처음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제 조건이 달라졌다. 감각을 곧바로 외부로 출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설명을 완성하지 않아도, 개념을 정리하지 않아도, 감각이 서사의 형식으로 정리되어 공유될 수 있는 경로가 생겼다. 이 변화는 창작자의 기준을 낮춘 것이 아니라, 창작의 출발점을 앞당긴 것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의 감각자는 더 이상 오랜 우회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먼저 창작자가 되고, 그다음에 배우는 순서도 가능해졌다. 감각을 증명하기 위해 훈련을 통과해야 하는 시대에서, 감각을 출력한 이후에 그 의미를 함께 다듬어가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감각자가 곧 훌륭한 창작자가 된다는 약속이 아니다. 다만 감각자가 창작자가 되어도 무리가 없는 조건이 처음으로 성립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조건의 변화가, 앞으로의 서사 지형을 조금씩 바꿔놓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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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후 해석의 시대에서, 동시대적 출력의 시대로
우리는 늘 뒤늦게 이해해 왔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사회적 균열이 커지고, 그다음에야 비평과 해석이 따라붙는 방식이었다. 사건이 먼저 터지고, 그 의미는 한참 뒤에야 언어로 정리되었다. 그래서 많은 설명은 언제나 사후적이었고, 그때쯤이면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지점에 도달해 있곤 했다.
이 구조가 필연이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감각이 사회적 언어로 전환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문제를 느끼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 감각을 공유 가능한 형태로 출력할 방법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해는 늘 늦었고, 대응은 더 늦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감각이 먼저 출력되고, 그것이 즉시 공유되는 장면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직 설명되지 않은 상태, 결론이 없는 아이러니, 불편한 질문들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떠다닌다. 완성된 해석은 아니지만, 최소한 감각은 더 이상 개인 내부에 갇히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는 속도다. 감각에서 출력까지의 시간이 줄어들면서, 사회는 자기 상태를 더 빠르게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곪아서 터진 이후가 아니라, 곪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관측할 수 있는 조건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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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맺으며: 과도기는 조용히 관측되기 시작한다
물론 이 변화가 곧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더 많은 말이 나온다고 해서 사회가 곧바로 더 현명해지는 것도 아니다. 혼란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고, 의미 없는 출력과 과잉된 감정 역시 함께 증가할 것이다. 과도기는 언제나 소음과 함께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 사회가 자기 상태를 실시간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설명이 완성되지 않아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지금 느껴지는 불일치와 아이러니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 관측은 조용하지만 지속적이다. 누군가의 선언이나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출력들의 누적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만으로도 과도기의 리듬은 이전과 달라질 수 있다. 과거의 과도기가 침묵 속에서 붕괴를 향해 갔다면, 지금의 과도기는 말해지지 않은 상태들이 먼저 표면으로 떠오른다. 이 변화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더 이상 완전히 뒤늦게만 이해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과도기는 여전히 불안정하지만, 이제는 관측 가능한 형태로 우리 앞에 놓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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