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은퇴한 지 여섯 달이 지났다. 30여 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친 내게 가장 큰 변화라면 매일 출퇴근할 일이 없다는 것. 직업이 없으니 백수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저 홀가분하게 자유인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간 바쁜 일과에 쫓기듯 살면서 미뤄왔던 걸 배우고 해 보는 데만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고향의 한 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도 생겼다. 가을학기 시작인 9월이라 KTX를 타고 여행하는 기분으로 매주 학교엘 간다. 혼자 계신 노모도 뵐 겸 다녀오는 길이라 일석이조가 따로 없다. 직장생활 중엔 - 부서 이동 정도 빼면 - 뚜렷한 분기점이 없는데, 한 학기가 시작되면 나는 문득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여행자가 된다.
K컬처 여행을 시작하며
K컬처를 주제로 학생들을 만난다. 흥미로운 글감이 모이면 브런치에도 올려볼 생각이다. 이미 글로벌 현상으로 떠오른 K컬처에는 이야깃거리가 넘친다. 날마다 새로운 소식이 올라올 정도로 숨 가쁘게 돌아가니,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예전 뉴스는 금세 올드해지고 만다. 강의내용은 수시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그만큼 K컬처의 성장세가 빠르고 역동적이란 뜻이다.
K컬처 강의 첫 시간에 나는 래퍼 에미넴(Eminem)의 자전적인 영화 <8마일>(2002)을 소개한다. 조금 뜬금없는 것 같지만, 세계 팝음악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K팝의 위치와 위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미넴은 드라마틱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고 <8마일>도 아주 재미있는 강추 영화다. 힙합이란 음악장르를 이렇게 실감 나고 에너지 넘치게 보여줄 수 있다니 몇 번을 봐도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다.
*8마일은 미국 디트로이트 시내 중심가와 변두리 빈민가를 나누는 도로명이다.
에미넴은 장르를 불문하고 2000년대 이후 최고의 음반 판매를 기록한 뮤지션이다. <8마일>의 주제가인 ‘Lose yourself’는 힙합 역사상 최초로 12주간 빌보드 핫 100 1위를 기록했다. 2000년대 미국 힙합을 대표하는 명곡으로, 그레미와 오스카를 동시에 수상한 최초의 힙합곡에도 올랐다.
탄생 50주년 맞이한 힙합, 대중문화 주류로
힙합은 올해 탄생 50주년을 맞았다. 1973년 미국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유래해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로 떠올랐다. 열악한 경제 상황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목소리로 시작해, 음악, 미술, 춤, 패션, 언어 등을 넘어 세계적인 문화 현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8월에는 힙합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세계 최고 수준의 종합 예술 공간인 뉴욕의 링컨센터에서 열렸다고 한다.
보통 힙합의 기본 요소로 랩(rap), 디제잉(DJing), 비 보잉(B-boying), 그라피티(graffiti) 등이 꼽힌다. 우리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힙합 문화는 한국에서 흔히 ‘X 싼 바지’라고 불리는 '배기팬츠'(baggy pants, 헐렁한 바지)다. 1990년대 인기를 끌었던 듀스, 지누션 등의 힙합 가수들이 즐겨 입었고, 90년대 'X세대 문화'를 상징하는 패션이 됐다.
건물 벽이나 담장 등을 캔버스처럼 이용해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리는 낙서 그림인 '그라피티'도 일반화됐다. 2021년에는 BTS의 '화양연화 on stage : prologue'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유명해진 서울대의 폐수영장이 철거 위기를 맞았다가, 뷔가 그린 그라피티로 인해 BTS 명소로 살아남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BTS <화양연화> 뮤비의 갈무리 장면 (서울대 폐수영장)
힙합 배틀과 우리 인생의 닮은 점
디트로이트 슬럼가 출신인 에미넴은 흑인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진 힙합에 도전해 조롱과 멸시, 차별과 장벽을 이겨내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약물중독인 싱글 맘 아래에서 흙수저 인생을 살면서, 왜소한 체구로 왕따를 당하고 고등학교도 중퇴했다. 결국엔 힙합과 랩에서 놀랄 만한 인생 드라마를 썼다.
영화 <8마일>의 압권은 힙합 배틀이다. 단 45초라는 짧은 시간에 ‘시원하게 썰을 까서’ 상대의 기를 홀딱 빼야 한다. 열기 가득한 장내에서 관객들이 외친다. “쫄지 마!!” 결승전 시간은 1분 30초, 에미넴은 "엄마 트레일러에 빌붙어 사는 백인 쓰레기"라고 자신의 찌질함을 스스로 폭로한다. 모든 것에 솔직해지기로 하고 자신을 디스하는 것이다. 그리곤 배틀 챔피언인 상대를 ‘무늬만 갱스터’라며 약점을 공격한다.
어릴 때부터 이야기꾼의 소질이 있었던 에미넴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신만의 스토리와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무기는 '솔직함과 진정성'이 아닐까. 인생의 불운과 실패를 인정하고 그 지점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모든 여정을 함축해 보여주는 것 같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항상 래퍼 에미넴을 본보기로 삼는다. 사람들은 절대 에미넴을 욕할 수 없다. 그는 미리 스스로 지은 노랫말로 자신을 욕하고 답하기 때문이다. 좋은 글은 타인을 설득하지 않는다. 비판받을 만한 곳에 미리 가 있을 줄 아는 작가가 성공한다. “ - 작가 닐 스트라우스
영화 <8마일>의 힙합 배틀 결승전 장면
K팝이 흑인음악이라고?
K팝은 힙합과 관계가 깊다. 힙합이 처음 한국에 들어왔던 1990년대는 홍대 주변 클럽의 '언더그라운드'에서 주로 소비되다가, 드렁큰타이거, 에픽하이, 다이나믹듀오 등의 뮤지션들에 의해 '오버그라운드'가 만들어지고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게 됐다. 2012년에 시작한 엠넷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가 힙합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가 처음에 힙합 전문 음반기획사로 출발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크리스털 앤더슨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케이팝은 흑인 음악이다>(2022)에서 K팝과 흑인 음악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K팝은 힙합, R&B 등 흑인 음악의 영향을 받아 이를 한국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킨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2017년 언론 간담회에서 "서구인들에게 낯선 K팝의 베이스로 (이미 익숙해진) 흑인 음악을 섞었던 것이 미국 음악시장에서의 성공 비결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K팝의 정점에 선 BTS는 2013년 힙합 아이돌로 출발했다. 근래 주로 팝댄스 풍의 곡을 선보였지만 초창기 정체성은 단연 힙합이었다. 데뷔 전 RM, 슈가 등이 힙합 크루로 활동했다.
문화는 교류와 융합 통해 발전
이처럼 K컬처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홀로' 빛나는 문화현상도 아니다. 세계의 거대한 문화 흐름 속에서 길지 않은 기간에 모방과 변용, 파괴와 창조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힙합 탄생 50주년인 올해 세계 팝의 정상에 선 BTS는 데뷔 10주년을 맞이했다.
교류와 융합은 문화에서 필수적이다. 에미넴은 흑인들의 홈그라운드라고 할 힙합 장르에서 일종의 역차별과 사회적 장벽을 허물고 새로운 혼종의 문화를 만들어냈다.문화는 경계나 차별이 없고 얼굴색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K컬처는 아시아라는 '변방의 북소리'에서 시작했지만 어느새 세계 문화의 주류로 주목받는 시대가 됐다. 따라가는데 급급한 듯했지만, 이제는 독창적인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세계 문화판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