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집안 어른이 돌아가셨다. 누구에게 연락할지 고민이 됐다. 현역이라면 회사(부서)가 알아서 처리해 주니 별로 걱정할 게 없다. 하지만 나 같은 은퇴자나 자유인이라면 적잖은 고민이 따른다. 1년 전에 회사를 떠났는데 업무로 맺어진 사람과는 언제까지, 어느 선까지 연락하는 게 적절할까.
내 연락처를 들여다보면 많은 관계가 일로 만난 사람들이다. '의례적인 명함 돌리기'로 한 번 만나고 만 사람들까지 혹시나~ 하고 입력돼 있다. 명함 앱이 있어 편리한 점도 있지만, 어느 순간 짐처럼 쌓여 있다. 지금 연락을 한다는 건 계속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다. 일로 만난 사람들이니 그런 방식의 관계가 지속될 것이다. 만약 그 사람과 상하관계라면 평생 그런 지위 관계가 연결된다는 걸 뜻한다. 과연 그게 바람직할까.
나는 과감하게 정리하기로 했다
은퇴 후 내가 생각한 첫 번째 모토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핵심은 결국 인간관계. 은퇴 후 생활의 모든 부분은 리셋된다. 우리의 일상과 삶은 크게 일과 놀이, 관계로 나눌 수 있다. 은퇴 후에도 여전히 일이나 주업이 있을 수 있지만, 차츰 많은 시간은 취미나 자기 계발 같은 놀이적인 것으로 바뀐다.
나의 경우, 가장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게 인간관계. 한때 연락처가 수백, 수천 명인 현역도 은퇴 후 교류하는 사람은 수십 명으로 줄어든다. 물론 사회활동이활발한 사람은 변화가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게 마련이다.
현역 시절 나도 제법 여러 모임에 참석했다. 동창회나 입사모임 등에서 회장이나 총무를 맡은 적도 몇 차례 있다. 모임이 이뤄지고 사람들이 어울리는 걸 보면서 자연스레 재미와 보람을 느꼈다. ‘일로 만나서 친구가 된다.’ 한창때 나는 그런 관계를 머릿속에 그리며 사람을 만났다. 일 년에 한 명만 쓸만한 친구를 사귀면 직장생활 30년, 30명의 절친이 생기지 않을까 상상하곤 했다. 결과적으로 지금 돌아보면 그 수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어떻게 정리할까
유명한 정리 전문가는 옷의 경우 더 이상 설레지 않으면 정리를 권한다. 2년이 지나도록 입지 않게 되면 정리에 들어가는 게 좋다고도 한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1년 동안 전혀 연락이 없다면 관계를 고민해봐야 한다. 2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라면 정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현역이라면 오다가다 얼굴이라도 보게 되지만 은퇴자는 그럴 일이 없다. 혹시 진심으로 근황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먼저 연락을 취하는 것도 방법이다. 관심과 애정을 나누는 건 인간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필수 요건이니까. 나는 가끔 카톡에 뜨는 지인의 생일날 축하 쿠폰을 보내기도 한다.
SNS는 어떨까. 인간관계의 맹점이야말로 SNS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단톡방은 특히 그렇다. 여러 사람과 교류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때로 위안이 될 수 있다. 근데 알고 보면 모임 공지를 받거나 경조사 정도를 교환할 뿐인 경우가 대다수다. 다른 사람의 내밀한 사정이나 인생 고민은 전혀 알 길이 없다. 나이 들수록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나답게 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단톡방의 많은 사람이 진실로 내게 필요한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는 10명 이상의 단톡방은 가급적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수백 명이 회원인 회사 OB모임이나 동창회, 동기들 모임은 점차 활동을 줄이면서 '잠수 모드'에 들어갔다. 최근 또 한 번의 결단을 내렸다. 10여 년 전에 업무적으로 만난 연수동기 모임이다. 10여 명이 5년 정도 꾸준히 모였지만, 코로나 시즌을 거치면서 끊겼다. 최근 단톡방이 가동됐는데, 며칠을 고민하다 ‘조용히 나가기’를 눌렀다. 이제 그런 모임은 내가 원하는 관계가 아니란 걸 안다. 마음이 통하는 몇 사람들과 자주, 깊이 만나고 싶다. 왁자지껄 번잡한 술자리가 아니라, 나는 소수만의 '조용한 수다'를 꿈꾼다.
이제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어떤 사람을 계속 만날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나와 결이 맞는지, 마음이 통하는지가 핵심이다. 그래야만 서로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긴 인생을 통틀어 교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점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두어야 한다. 예전에 얼마나 친했느냐가 아니라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관계 설정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만나면 마음이 편하고, 배울 점이 있거나 서로 나눌 만한 것이 있어야 깊게 오래갈 수 있다.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나를 활용하려 하거나 자뻑이 심한 사람, 무엇보다 무례한 사람과는 신속히 '절단신공'하는 게 좋다. 그 사람과 계속 만나야 할지 고민된다면 끊는 게 적절하다. 관계는 '주관적인 감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가 우선된다는 말이다. 스타 유튜버 김미경은 인간관계는 만나는 실력이 아니라 '보내주는 실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보낼 때가 되면 보내야 한다.
내 인생의 소중한 사람들
경조사를 마무리한 후 나는 조문이나 부의를 보내준 지인들에게 답례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친밀도나 지인들의 거주지 사정 등에 따라 3단계로 구분했다. 밥을 살 사람, 커피 쿠폰을 보낼 사람, 그리고 감사 답신을 보낼 사람. 감사의 마음에는 감사 표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조사 때 받는 축의나 부의는 알고 보면 모두 빚이 아니던가. 그들에게 좋은 일, 궂은일이 닥치면 함께 하는 게 도리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정성을 다하는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만큼 진심으로 대해야 나도 그렇게 기억되지 않을까.
내 인생의 일인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업무적으로 만난 어떤 사람이 더 이상 일을 넘어 '내 인생'의 상사가 되면 곤란하다. 이제는 의례적인 인간관계에 소비할 시간이 없다. 진짜 소중한 사람에게 마음을 더 쓰고, 밥도 자주 같이 먹고, 그에게 칭찬과 배려를 보내는 게 필요하다. 그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보는 게 내 인생에도 활력이 솟는 지름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