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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Jun 17. 2023

투 뿔 한우집의 빌런들

 영화 <범죄도시 3편>이 인기 절정이다. 1천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코로나 이후 영화보다는 OTT, 극장보다는 넷플릭스를 찾는 시대에 왜 그렇게 인기일까. 물론 영화를 재미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가끔 콜라나 사이다를 찾는 것처럼 일상에는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우리 주변에 빌런들이 너무 많기 때문 아닐까. 빌런들을 통쾌하게 박살 내는 마동석의 쾌도난마형 액션은 답답한 현실에 청량감을 준다.     



나는 어쩌다 빌런이 됐나


지난 5월 전주에서 모임을 가졌다. 일 년에 네 번, 8인조가 전국을 돌아가며 모인다. 모두 현직일 때 모임을 시작했으나 어느새 다수는 ‘연수자’(연금수급자)가 됐다. 한창때는 2차, 3차까지 밤을 잊고 음주가무를 즐겼건만, 야속한 세월 앞에 모두 옛말이 됐다. 무알콜맥주로 갈아탄 선수들이 절반이다. 그래도 매번 모일 때마다 왁자지껄하다.     


이번 모임의 주관자는 ‘인격자’로 불리는 넘버 2(나이순) 형님이다. 저녁 장소는 모악산 근처 한우구이집. 비싼 고급식당이 연상되지만 투 뿔 꽃등심이 1만 5천 원 수준(100g)으로 가성비 높은 정육식당이다. 몇 년 전 가본 적이 있는데, 그간 장사가 번창했는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최근 다시 오픈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테이블이 점점 차면서 식당 안은 제법 시끌벅적해진다. 우리도 전원 출동이다. 이런저런 얘기가 꽃을 피우고 서서히 열기가 뜨거워진다. 특히나 올겨울엔 코로나로 못가 본 해외여행을 반드시 결행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어디로 갈 것이냐, 행선지를 정하는데 의견이 분분해지면서 장내가 점차 소란지경에 빠진다. 그때였다. 옆자리에서 고함인지, 외침인지 귓전을 파고드는 큰 소리가 울린다.     


“아니, 여기 전세 냈어요?”     


좌중은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소리가 난 옆 테이블엔 젊은 부부와 어린 딸 그렇게 셋이 있었다. 소리친 남자는 앞에 불판 쪽을 보고 있고 여자도 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우리는 꿈같은 해외 여행지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로 내동댕이쳐진다. 명백히 우리의 실수다. 근데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약간 불쾌한 감정이 일어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반사적인 말대꾸나 어떤 충돌 같은 건 없었다. 거기는 '인격자'의 나와바리였고 더 이상 무례함은 곤란했으므로.      




일상의 빌런들 - 피해자와 가해자


갑자기 빌런이 되고 보니 문득 4월에 찾은 제주 함덕해안의 밥집이 떠오른다. 1940년에 지어져 병원으로 쓰던 건물이 정갈한 한식당으로 리모델링는데, 전에 쓰던 물건들을 인테리어에 활용해 분위기가 독특하고 좋았다. 제법 인기가 많아서 웨이팅까지 있다.     

 

30여 분을 대기하다 테이블이 셋인 좁은 실내에 들어섰다. 구옥이라 방들이 작았는데, 60대 여자와 50대 남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식사를 마친 옆테이블 손님들로 여자가 거의 대화를 주도했다. "딸이 미국은 싫다면서 한사코 독일 유학을 고집했다. 미술 하면 독일, 독일 표현주의가 끝내주지 않느냐?" 거침없는 강의형 소음이 실내에 중계되고 있었다. 꽤나 배우신 분 같은데 무례함이 뭔지는 모르는 듯했다. 


항의를 해야 하나, 저런 빌런에게 괜히 엮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다행히 10여 분 됐나, 그들이 나간다. 좁은 공간에 울려대는 소음이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실감한 순간이었다.



그들이 떠나자, 밥맛이 아연 좋아졌다

     

한 달 전쯤 카페에선 피해자 겸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 4층으로 이뤄진 종로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카공족 애용층이었는데 갑자기 이야기 소리, 웃음소리가 크게 들린다. 공부가 끝났는지, 일행인 듯 3명이 한 곳에  모여 있다. 문제는 내 자리 바로 앞쪽이라는 것.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한동안 그들을 노려봤다. 레이저 광선을 느꼈는지 조금 뒤에 그들은 흩어진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 방법이 참 아니었구나, 현타가 왔다. 조용히 소리를 낮춰달라, 고 했으면 됐을 텐데 왜 그랬을까.      



빌런 예방법, 빌런 대처법


주변에 수많은 빌런들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고, 자신도 어느새 빌런이 되고야 마는 시대가 됐다. 왜 이리 빌런이 많아졌을까. 너무 자신에게빠져들기 때문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적당한 거리 두기는 코로나 시대와 상관없이 필요하다. 최고의 빌런 예방법이란 과도한 자기 몰입과 집중을 자제하고, 주변을 살피고 배려하는 건 아닐까.      


빌런 대처법도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 차분하고 정중한 자세가 중요하. 일단 상황을 말하며 협조를 구하는 게 현명하다. 빌런이 되지 않기 위해 거리 두기가 필요한 것처럼, 빌런과 맞닥뜨렸을 때도 적당한 거리는 필수다. 감정적인 대응은 도움이 안 되는 법.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불같은 분노를 터뜨려선 곤란하다. 한우집의 그 남자는 어쩌다 분노라는 폭탄을 터뜨리고 말았을까, 우리의 실수는 미안하지만, 그런 식의 감정 폭발은 위험하지 않을까. 쉽게 욱하는 사람과 부딪치면 괜한 시비로 타오를 수 있다. 나도 이제 레이저를 조심야겠다.


공공장소뿐만 아니라 가까운 생활공간에서도 빌런을 흔하게 만난다. 특히나 이웃 간의 층간소음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진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숨을 고른다, 사는 건 경주가 아니라 여행이라는 기분으로 지금 이 순간의 여유를 바라본다 - 제주 함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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