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을 떠나면 삶의 방식이 크게 바뀐다. 한창 일할 때는 내가 속한 조직이나 관계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진다. 내가 그 안에서 인정받고 월급을 받으며 생계를 이어나가기 때문이다. 현역이 주는 혜택을 누리려면 싫든 좋든 그 조직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하지만 막상 사무실에 나가면 밉상에 빌런 같은 상종하기 싫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평생 나를 보호해 줄 것 같은 그 조직도 때가 되면 떠나야 한다. 누구에게나 은퇴는 냉정한 현실. 매일 출근할 데가 없어지고 명함도, 사회적 지위도 사라진다. 수입과 인간관계도 크게 줄면서 쪼그라든다. 아무리 좋은 자리에 있더라도 은퇴 후 조금만 지나면 그냥 '동네 아저씨'다. 때로 자괴감이 들며 순식간에 위기감에 빠져들 수도 있다. 적절한 은퇴 후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더 이상 출근할 일이 없어지면서 차츰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진실의 시간’이랄까.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시간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자세라는 걸 깨달으면 된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젊은 층보다 50대 이후에서 높아지는 게 이해가 간다. 나 또한 현역보다 오히려 은퇴 후 인생이 훨씬 행복해질 수 있다고 느낀다. 그 이유를 3가지로 정리해 봤다.
1. 인생의 프레임이 바뀐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다. 그간 앞만 보고 달렸다면, 이제는 욕심을 내려놓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현역은 생존이 제1 화두다. 속도와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나의 능력을 바닥까지 보여줘야 한다. 체력과 멘털이 모두 인생 최고조에 달한 시기, 원하는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해야 한다. 내 뜻을 펼치기 위해 그 목표를 향한 긴장이 극에 달한 때다.
하지만 은퇴 후엔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조직을 떠나면 비로소 조직 밖과 외부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 자리까지 올라갔는지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게 느껴진다. 멈춤의 시간이랄까, 자신과 세상을 찬찬히 바라보며 앞으로 갈 길을 묻게 된다. 나이가 들고 일에서 멀어지면 의외로 좋은 점도 많다는 걸 실감한다.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자유인의 삶'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인의 최고 좋은 점은 평일에 여행하는 것. 5월 어느 날 제주 '서핑의 성지' 월정리 해변 풍경 ⓒ김성일
2. 모든 것은 내가 정한다
이제는 온전히 나를 위해 산다. 내 인생의 주관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현역은 끊임없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나를 평가하고 인정하는 대상이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상사나 동료, 나 아닌 누군가가 정해 둔 평가기준. 나는 다만 그 기준에 따라 처분을 받을 뿐이다.
현역 시절 매년 근무 실적 평가가 있었다. 2000년대 중반쯤이던가. ‘다면평가’란 제도가 도입됐다. 상사와 부하, 동료들이 나 한 사람을 탈탈 털듯이 크로스로 평가한다. 승진심사를 앞두곤 어김없이 진행됐는데, 내가 받아본 결과지엔 '나의 서열'이 숫자로 적혀있었다. 그 줄 세우기 숫자는 매번 큰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산다. 나를 평가하는 건 더 이상 외부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남의 시선이 아니라 오직 '과거의 나'와 비교할 뿐이다. 어제보다 한 걸음, 조금이라도 발전하는 나라면 충분하다. 나는 날마다 조금씩 너그러워지면서 잊고 살았던 ‘인간성’을 회복하고 있다.
3. 성과가 아니라 성장이다
조직은 목표가 있고 업무는 실적을 내야 한다. 시간과 자원을 투입한 만큼 기대한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이다. 기업이나 조직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끊임없이 결과로 평가받는 게 당연할 수 있다.
이제는 성과가 아니라 성장이 중요하다. 인생은 '끝없는 성장의 여정'이라고 한다. 사회학자 벤저민 바버는 “나는 세상을 강자와 약자, 성공과 실패로 나누지 않는다. 세상을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로 나눈다.”고 말한다. 은퇴 후 내게 가장 재미있는 건 ‘뭔가를 배우는 일’이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고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즐겁다. 거기엔 높은 목표도, 꼭 이뤄야 하는 성과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즐길 뿐이다.
현역일 때 행복해지려면
그렇다고 현역이 마냥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이 3가지를 자신에 맞게 적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을 길게 보고 프레임을 바꾸는 게 우선이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나의 능력과 여건에 맞는 위치에서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내게 맞는 속도와 체력으로 레이스에 참여해야 건강하게 오래갈 수 있다. 다음으론 나만의 평가 기준을 갖는 것. 외부에서 주어진 서열이나 순위보다 현실적으로 내가 목표로 하는 곳에서 만족하는 게 중요하다. 실현가능한 목표치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꾸준히 성장하는 것. 회사의 일에만 얽매이는 게 아니라 차근차근 나만의 내공을 쌓아가는 것이다. 점심시간이나 저녁, 주말 등 틈나는 시간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새로운 학습이나 자기 계발 등등 내 칼이 녹슬지 않게 갈아두면 삶에 대한 자신감도 덩달아 높아지지 않을까.
카공은 혼자만의 놀이와 몰입의 시간이다. 광주 호남대 주변의 카페에서 ⓒ김성일
오늘도 배우는 사람
나는 은퇴 후 일상을 3가지로 단순화했다. 공부, 놀이 그리고 관계다. 세 가지 모두 날마다 재미를 느끼는 것들이다. 가슴이 설레지 않거나 흥미가 떨어지는 건 그만둔다. '유튜브 동영상 제작' 같이 그간 안 해 보거나 새로운 걸 시도해보려 한다. 공부도, 놀이도, 사람을 만나는 일도 모두 인생을 배우는 일에 속하니 매사 즐겁게 임하려고 한다.
도서관과 카페는 내가 즐겨 출근(?)하는 곳이 됐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카공을 즐긴다. 가능하면 종로나 신촌, 홍대처럼 젊은 층들이 많은 곳의 카페엘 간다. 거리에서 느끼는 젊고 활기찬 기운은 내게도 신선한 활력을 주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며 여기저기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나의 일상을 돌아본다.
(1) 공부 - 도서관과 평생학습관 강좌 참여, 카공, 독서, 글쓰기, 강의
(2) 놀이 - 아침에 1일 1시(詩) 읽기, 주 2회 필라테스, 걷기와 산책, 맛집 방문 이벤트, 여행
(3) 관계 – 가족과의 정(情) 타임, 정기/수시로 친구와 만남, 수다와 어울림, 함께 취미활동
나다운 삶을 산다는 것
30년 넘게 조직 생활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체질은 '공부하면서 노는 것'에 가깝다. 머리가 좋거나 성과가 뛰어난 건 아니고 뭔가를 알아가는 것 자체가 설렘과 기쁨을 준다. 60대에야 자신이 어떤 사람이란 걸 느낀다. 역시 인생이란 쉼 없이 성장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희끗해질 무렵에야 철이 들기 시작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중요한 건 '자기 자신에게 맞는 인생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나다운 삶'을 말한다. 현역일 때는 여러 사정으로 생존에 집중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은퇴 후까지 그래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이제부터는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행복해진다. 내게 적합한 일상의 계획을 설계하고 실천하는 게 행복한 노후의 지름길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게 우선이다.
나다운 삶을 살려는 모든 분들을 응원한다. 오늘도 그들의 하루에 재미와 보람이 있기를 기원한다.
요즘 매주 남산도서관에 강의 들으러 간다. 조금 일찍 가서 남산공원을 산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김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