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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일 Jun 10. 2024

은퇴 선배가 현역을 만날 때 필요한 자세

은퇴에서 배우는 인생 2

지난 5월 어느 날 저녁, 2017년 무렵 한 부서에 근무하며 인연을 맺었던 모임에서 일어난 일이다. 6명 중 절반이 은퇴하고 절반은 현역 막바지, 현역 중 두 사람이 최근 승진해 축하하기 위한 자리다. 비주얼이 끝내주는 샤브샤브는 맛도 깔끔하고 담백해서 다들 기분이 좋아졌다. 요즘 대세인 하이볼을 한 잔씩 앞에 두고 정다운 건배사도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빈 반찬그릇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은퇴한 A가 말한다.


"어? 반찬 떨어졌네. 시켜야겠다."


다른 자리에서 자기가 이렇게 말하는 걸 불현듯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현역일 때 팀장(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어느새 '입만 가지고 일하는 갑 근성'이 몸에 밸 줄은 자신도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화들짝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 나는 과연 어떤가 돌아봤다. 반찬이 떨어지면 직접 시키면 되는데, 예전 간부급으로 근무할 때는 '아랫것'들이 알아서 시키는 게 당연하다시피 했다. 지시에 익숙한 윗분(?)은 중심만 잡고 있으면 되는 게 미풍양속이던 시절이었으니까.


이번에 승진해서 팀장이 된 B는 흥미로운 얘기를 꺼낸다. 내일 부서 워크숍이 예정돼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 퇴근 무렵에야 알았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모두 결정하고 자기는 통보만 받는 입장이라는 것. 요즘 '회식'은 고사하고 점심도 같이 먹으려는 직원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뉴스에서만 들었던 얘기들이 진짜 현실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념인지 초월인지 뜻 모를 말을 무심코 B가 덧붙인다.   

 

"같이 가자고 끼워는 주니까 고맙다고 해야죠."


은퇴 선배들은 위로와 응원의 말을 건넸다. '아랫분들'과 친하게 잘 지내라고. 달라진 세태와 문화, 거기에 무슨 옳고 그름이 있겠는가, 씁쓸하지만 그게 현실이라면 수용하고 적응하는 게 상책이 아닐까.


한국 사회는 정말 빠르게 변한다. 그런 역동성이 이만큼 우리가 발전한 원동력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화의 중심에 선 사람들은 하루하루 사는 게 만만치 않다. 나 같은 686세대들은 그 변화를 가장 절실하게 체감한 세대가 아닐까. 69년생인 B후배까지는 거의 막차 탑승자 같다. 물론 나보다는 훨씬 더 온몸으로 체감하며 적응에 몸부림치고 있을 것이다.



분투하는 낀 세대의 인생


‘더블 케어’라는 말이 실감 난다. 부모님 모시랴, 자식들 챙기랴, 현재의 베이비부머 세대가 이중으로 고생하는 걸 말한다. 직장에서도 비슷하다. 예전 상사들은 꼰대 기질이 농후했다. 종종 '핏대'라고 불리던 상사들이 있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은 사실 '환자'다. 시도 때도 없이 아랫것들을 볶아대는 '분노조절장애' 환자. 무릎을 까이거나 인격 모독을 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살아남으려면 어쩔 것인가. 모멸과 분노의 날들을 술로 달래며, 몸은 또 몸대로 망가지는 게 그들의 직장 생활 분투기다.


지금 아래 직원들은 어떤가. MZ세대 특유의 개성과 자유분방함이 넘친다. '9시 출근'이란 과연 9시까지 도착한다는 걸까, 9시에 일을 시작한다는 의미일까. 예전 우리 땐 '시작'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압도적으로 도착'이 아닐까 싶다. "5분 먼저 출근하면 5분 먼저 퇴근해도 되냐?"고 묻는 게 요즘 세대다. 그러니 B 같은 후배들은 잘못하면 중간에 끼어 고생하기 십상이다. 나 같은 은퇴자 입장에선 그런 후배 보기가 미안할 때가 많다.



함께 가는 인생 친구


은퇴 선배들은 처신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꾸 후배들에게 연락해서 '민원'을 부탁하거나 힘들게 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예전 기분으로 계속 목에 힘주고 행세하거나 '라떼 인생'을 되풀이하면 '추한 선배'로 남기 쉽다.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후배들을 대하는 A 같은 은퇴자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은 이럴 때 적절하다. 정말 인간적으로 친한 현역 후배들이라면,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응원하며 서로의 인생을 나눌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이제부터는 '업무상 동료' 관계를 넘어 함께 늙어가는 '인생 친구'와 가까워지는 나이니까. 만날 때 '귀는 열고 눈은 웃어라'는 말도 추가하면 좋겠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내가 행복해진다. 내가 행복하면 내 친구와 동료 후배들도 조금 더 행복해질 것이다. 오늘도 즐겁게 많이 웃어야겠다. 종종 마음속으로 외친다. 현역 파이팅.





가끔 현역 시절이 생각난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이젠 든든한 후배들이 있으니까. ⓒpixabay




* 표지 사진은 5월 모임 메뉴인 샤브샤브. 추억의 부서 회식이 그리워진다. ⓒ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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