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때 ‘음주가무’는 퇴근 후 나의 일상이었다. 업무가 끝날 무렵 은근한 눈빛으로 “이따 함께 퇴근하자.”라는 건 ‘한잔하자’는 의미였다. 일이 많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자연스레 ‘참새방앗간’처럼 술자리를 찾았다. 은퇴 2년 차, 지금은 술을 잊고 지낸다. 전혀 아쉬움 같은 건 없다. ‘음주 총량의 법칙’이랄까, 내 인생의 술은 진작에 정량 초과다. 모든 건 때가 있는 법, 이제 본격적인 은퇴 생활에 접어들었다는 실감이 든다.
세대 간 화합의 이슈를 분석한 허두영의 <세대 공존의 기술>(2019)은 ‘꼰대 질량보존의 법칙’이란 게 있다고 말한다. 어디를 가나 눈치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중년 남성을 칭하는 ‘꼰대’가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꼰대란 다음과 같은 3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말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하고 배우지 않으며, 기득권과 권위에 기댄 채 버릴 줄 모른다.
대한민국 중년 남자들이 위험하다. 특히 은퇴한 남자들은 평생의 일을 떠난 허탈감 속에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앞만 보고 쉴 새 없이 달려온 그들이 안쓰럽고 안타깝다. 어떻게 하면 은퇴한 남자들의 생존 능력과 적응력을 키워갈 수 있을까. 같은 처지의 남자로서 곱씹어보는 3가지 문제들을 돌아본다.
1. 기초 생활 능력
고독사가 매년 크게 증가하고 있다. 10명 중 5명이 중장년층 남성이고 남성이 여성보다 5배 이상으로 많다. 2022년 보건복지부가 최초로 조사한 고독사 실태 결과다. 고독사 증가는 이미 세계적인 추세로 영국은 2018년에, 일본은 2021년에 고립과 외로움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를 설치했다.
고독사 급증의 가장 큰 원인은 1인 가구의 증가. 대한민국 세 집 중 한 집은 1인 가구인데, 다인 가구에 비해 주거와 일자리, 사회적 관계가 허술하다. 중년 남성이 고독사에 취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초적인 생존력이 떨어지는데, 특히 건강관리와 가사 노동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제 능력은 기본.
오랜 직장 생활로 남자들 대부분은 건강을 돌보지 못한 경우가 많고 가사와 일상생활에 서툴다. 이제부터 정기적인 건강 체크와 평소 운동은 필수로 생각하고, 요리와 가사 등에도 발 벗고 나서야 한다. 은퇴 후엔 일상과 삶 전체를 리셋할 필요가 있다. 달라진 현실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환경과 여건에 맞게 나를 바꿔나가야 한다. 잘나가던 과거에서 벗어나 지금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는 사고의 전환이 절실하다.
주변의 은퇴한 친구들은 한결같이 “집안에서 자신의 쓸모(?)를 늘려가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한다. 각종 가사 보조의 전담 마크맨을 자임하되, 하루 세끼를 눈칫밥으로 때우는 ‘삼식이’는 극구 탈피한다는 것. 나 또한 집에서는 운전, 설거지와 세탁, 쓰레기 처리 등을 차질 없이 수행하려고 한다. 은퇴 후 필라테스와 요가라는 새로운 운동 루틴도 만들어가며 건강을 돌보고 있다. 1년 넘게 여자들 틈 속에서 ‘나 혼자 남자’로 버티는 중이다.
2. 유연성과 사회 적응력
나이 30을 넘으면 새로운 노래를 안 듣고 60을 넘으면 새로운 친구를 안 사귄다고 한다. 세계적인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업체인 스포티파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평균 33세가 되면 익숙한 음악만 듣는다고 한다. 20대까지는 새로운 대중음악을 듣지만 나이가 들수록 음악적 선호도가 굳어진다는 것이다. 새로운 음악을 듣는 건 우리의 뇌를 자극하고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은퇴 후 남자들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현역의 연장이 아닐까 싶다. 대개 일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가 계속되는데, 과연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할 ‘자유인의 인생’에 바람직할까. 새로운 사람을 사귈 수 있다면 좋지만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존 인간관계에서 옥석을 선별해 나가고, 오래 알아왔지만 바쁘게 사느라 연락이 뜸했던 사람과 만나보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취미활동과 자기 계발에서도 변화를 시도해 보면 일상의 활력을 얻을 수 있다. 대한민국 은퇴 남자들의 취미는 산행과 막걸리 한잔, 당구와 골프 등으로 너무 단순화, 표준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재미있는 인생을 살려면 새로운 것과 안 해본 걸 자꾸 해봐야 한다. 내게 맞는 아이템을 잘 찾으면 도전 의욕이 생기고 성취감도 맛볼 수 있다. 성장하는 재미와 보람은 덤이다.
나는 요즘 구청에서 운영하는 동영상 제작 수업에 빠져 있다. 자유인의 일상 브이로그를 만들기 위해 내가 자주 가는 곳을 스마트폰에 동영상으로 담고 있다. 익숙하던 공간이 다른 시각에서 보이기 시작하면서 일상 자체에 활력이 생긴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카공을 즐기며 도서관에서 노는 법도 익히고 있다. 여행작가 글쓰기, 패션과 미술사 강의 같은 유익한 강좌를 듣는 재미도 크다.
3. 공감력과 표현력
대처 켈트너 버클리대 심리학과 교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2016.12)에서 ‘권력의 패러독스’를 말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에 비해 무례하고 이기적이며 부도덕한 행동을 하기 쉽다.”는 것이다. 사실 권력이란 게 멀리 있지 않다. 세상의 모든 사회생활과 조직의 자리에는 갑을관계가 있고, 누구나 권력의 단맛과 유혹에 빠지기 쉽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한 남자들이 은연중에 빠져들기 쉬운 습성이다. 은퇴 후에는 목에 힘을 빼고 자연인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은퇴 후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돌아볼 기회가 자주 생긴다.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건 바로 감정 읽기와 마음 나누기가 아닐까 싶다. 우리 시대 남자들에게 부족한 점, 바로 ‘공감 능력’이다. 공감을 하더라도 잘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대한민국 남자들의 오랜 특성이 아닐까.
친구나 지인과 SNS를 하게 되면 공통으로 느끼는 것, 남자들은 흔적이나 리액션 남기는 걸 주저하고 ‘읽씹’도 빈번하다. 상대를 생각한다면 간단한 코멘트나 이모티콘이라도 남기면 좋을 텐데 말이다. 좋은 말과 반응이 오가면 관계도 훨씬 부드러워지게 마련인데, 무심한 남자들의 속을 알 길이 없다.
사실 예전에 나 또한 그랬다. 속마음이 드러나는 걸 경계하고 억제했으며, ‘진실의 순간’을 회피하는 경향이 많았다. 요즘엔 웬만하면 뭔가를 남기고 마음을 전하려고 한다. 브런치스토리의 글을 읽으면 쓴 사람의 노고와 성의를 생각해 어지간하면 라이킷을 누른다. 나를 구독하는 작가가 있으면 자주 맞구독한다. 갈수록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고맙고 소중하다는 걸 느낀다. 조금씩 철이 드는 것일까.
은퇴 후 인생에 격려와 응원을
거리에서, 카페에서, 도서관에서 은퇴한 사람들과 종종 스친다.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지금 은퇴생활을 하는 베이비부머 세대는 한국사회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대부분 중산층으로 올라섰지만, 부모와 자식을 동시에 부양하는 '더블 케어 세대'로 고생하는 처지다. 불안정한 노후생활로 힘겨운 시절을 보내는 이들도 다수다.
젊은 시절을 온통 일과 직장생활로 보낸 사람들, 은퇴한 이후엔 진짜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남자들의 경우, 은퇴 이후 삶은 여러모로 어렵고 고단한 상황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다. 기본적인 생활능력부터 사회 적응력과 공감 표현력까지, 그들의 일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기적의 한국 현대사, 놀라운 성공스토리를 쓴 의지와 저력으로 그들의 은퇴 후 인생 또한 행복의 길을 열어가길 기원한다. 오늘도 화이팅,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