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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사랑하는 법

문학, 영화, 친구 – 세상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즐거움

by 김성일

인생을 사랑하는 3가지 방법


요즘 소설 읽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독서 모임에서 책과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낯선 시공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현실인 듯, 꿈인 듯 소설 안과 밖을 오간다. 영화 속에도 빠져들고 있다. 수많은 이야기를 시각화해 보여주는 영화는 훨씬 생생하고 다채롭다.


얼마 전 ‘영화를 사랑하는 3가지 방법’을 읽었다. 1960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감독이자 평론가인 프랑수아 트뤼포의 글이다. 전해지는 문장은 달라도 핵심 내용은 3가지로 요약된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 두 번째는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 세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영화만이 아니라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에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삶의 순간을 반복해 돌아보며 성찰하는 것, 내 감정과 생각을 글로 쓰고 표현하는 것, 나만의 서사를 통해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삶을 실행하는 것’이다.



퇴직 후 배우는 삶


퇴직 3년 차 현역 시절과 크게 달라진 건 자신과 친해진다는 점이다. 특히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일은 지나간 삶을 돌아보며 내가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예전과는 다른 삶의 의미와 행복감을 체감한다. 글이 쌓이면서 책으로 펴낸 일에서 보람도 느낀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하나씩 그려보는 게 일상에 활력과 흥미를 일으킨다.


친구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도 퍽 즐겁다. ‘카톡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수많은 인간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를 겪으며 유효기간이 다하기도 한다. 이제는 소수의 사람과 자주 만나며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늘어간다. 그들의 삶에 공감하면서 인생을 배우고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40년 만에 들은 이야기


며칠 전 1년 후배 Y의 40년 전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삶이 한 편의 영화처럼 눈에 들어왔다. 비 예보가 오락가락한 흐린 날씨에 둘이 인왕산에 오른 날이다. 대학 시절 자주 어울리며 술 마시던 사이인 Y는 3학년 여름에 학교를 그만두고 돌연 자취를 감췄다. 나중에야 해양대로 진학했다는 걸 알았는데, 이런저런 궁금증만 세월 속에 묻혀갔다. 이후 뜸하게 만났어도 그 시절의 이야기가 화제에 오른 적은 없었다.


산행이 끝나고 우리는 노포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멋진 배를 타고 떠나는 세계 일주가 어린 시절 그의 꿈이라는 걸 알았다. 중학교 친구 하나가 해양대 제복을 입고 나타나자 잊고 있던 꿈이 불현듯 살아났다고 한다. 공교롭게 아버지가 쓰러져 집안 사정이 어렵게 된 점도 장남이던 그에게 진로를 고심하게 했다. 3년간 배를 타면 군 문제가 해결되고 취업의 장점까지 있던 해양대는 그의 인생행로를 바꿨다. 꿈 덕일까, 승선을 마친 후에도 사업과 자녀 교육 등으로 10년 이상의 해외 생활이 이어졌다.


집이 가까운 우리는 퇴직으로 시간 여유도 많아져 종종 만난다. 여러 사람이 왁자지껄 어울리는 것보다, 둘셋이 만나면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나라면 어땠을까,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삶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자주 만난다고 모두 친구는 아니다. 마음의 공명이 중요하다.



인생의 선택, 수많은 행로


주변의 친구를 보며 내가 그의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삶을 시작하는 시공간은 선택이 아니라 우연과 운명이 크게 작용한다. 인간은 그저 ‘내던져진 존재’라고 하지 않던가. 그 시공간 속에서 우리는 숱한 선택을 하고 결과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인생 항해를 떠난다. 친구와 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우연과 선택 속에서 그만큼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소설과 영화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뿐인 인생에서 수없이 많은 색다른 삶을 만나기 때문이다. 문학과 영화는 세상을 사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넘치는 삶의 보물 창고다. 며칠 전 독서 모임에서 다룬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글이 떠오른다.


우리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내 생각과 느낌이 누구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나는 생각과 느낌이 존재하는 장소일 뿐이다. (28쪽)

오늘 이곳에 실제로 자리한 사람은 이 남자 한 명이지만, 그가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존재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가 이곳에 올 때마다 겉으로 드러났던 그 다른 존재들은 이곳에 왔던 기억을 갖고 있다. 비록 그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168쪽)

- 주제 사라마구, 『히카르두 헤이스가 죽은 해』 중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욕망의 이야기


이야기의 주역인 사람을 움직이는 건 무엇일까. 바로 생존과 꿈을 향한 욕망이 아닐까 싶다. 거창한 욕망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 우리 마음이 저절로 향하는 힘이다. 알고 보면 어릴 적 우리의 그 ‘꿈’이고 마음속의 근원적인 동경이다.


인류 역사를 이끈 동력도 그런 욕망이다. 세계사의 특정한 시공간은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변주한다. 특히 한국의 현대사는 격동의 역사다. 놀라운 압축성장 속에서 우리는 영화보다 더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 그 안에는 숱한 사건과 사고, 특이한 인물과 경이로운 이야기가 넘친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욕망의 주역뿐만 아니라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의 삶도 다양한 색깔로 물들여진다.



다정한 삶을 향하여


가까운 친구와 자주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와 그들의 욕망을 들여다본다. 타자의 존재에서 나를 느끼고 내 속에서 다양한 나를 만나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는 것들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 갈수록 우리 삶을 이끌어온 고요한 마음의 소리를 듣는 데 친숙해진다.


인생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잘 아는 게 중요하다. 내 꿈과 욕망을 알면 나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에 공감하는 지름길 또한 그들의 욕망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모든 존재를 의식하고 그들의 욕망에 공감하는 다정한 삶을 살고 싶다. 우리 영혼이 각자 원하는 것에 훨씬 더 가까워질 것이다.




*표지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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