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최초의 인간’이다

- 카뮈의 『최초의 인간』에서 만나는 침묵과 사랑에 관하여

by 김성일

나보다 젊은 아버지라는 낯선 거울


“……스물아홉 살. 갑자기 어떤 생각이 뇌리를 치는 듯하여 그는 몸속 깊이에까지 동요를 느꼈다. 그 자신은 마흔 살이었다. 저 묘석 아래 묻힌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지만 그 자신보다 더 젊었다……”
- 알베르 카뮈, 『최초의 인간』. 33쪽.

마흔 살의 카뮈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의 묘비 앞에 섭니다. 그곳에서 그는 기이한 진실을 마주합니다. 아버지는 자신보다 열한 살이나 어린 '청년'의 모습으로 남아있었던 것이지요. 아버지가 강하고 두려운 존재나 거대한 벽이 아니라, 나와 다를 바 없이 서툴고 연약했던 ‘한 인간’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떠나가신 후, 저는 비로소 '아버지'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남도의 가난한 산골,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평생을 책임감이라는 무게를 지고 살았던 사람. 건강이 허락지 않아 꿈을 접어야 했던 고독한 중년. 다정함보다는 성실함으로 사랑을 증명했던 그의 삶이 아버지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제 안에서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


알베르 카뮈가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붙들고 있었던 미완성 유고작 『최초의 인간』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뜨거운 피가 흐르는 책입니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태양 아래서 냉소적인 ‘이방인’으로 살았다면, 이 책 속의 카뮈는 가난하고 고단했던 알제리의 유년 시절로 돌아가 생의 근원을 찾아갑니다.


그의 문학적 궤적은 흔히 ‘부조리에서 반항으로, 다시 사랑(연대)으로’ 나아갔다고 말합니다. 삶의 허무와 죽음이라는 부조리에 집중했던 시기, 어머니와의 관계 역시 건조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드러납니다. 뫼르소는 단순히 비정한 인간이 아니라 슬픔의 형식을 강요하는 사회 앞에서 사랑과 애도를 연기하지 않습니다.


만년의 카뮈는 그 허무를 넘어서는 ‘사랑’의 힘을 기록하려 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런 애틋한 연민과 따뜻함, 감사의 마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카뮈를 진정한 한 인간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기를 권유하는 이유입니다.


Screenshot_20260224_183545_Office App.jpg 카뮈의 작품 세계 변화


어머니의 침묵, 말보다 깊은 신앙


카뮈의 어머니는 문맹이었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에게 거창한 가르침을 주지도, 화려한 미사여구로 사랑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침묵에는 '가난의 윤리'가 담겨 있었습니다.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묵묵히 삶을 견뎌내는 단단함이었지요.


“그녀는 나의 신앙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통해 모든 것을 배웠다.”
- 카뮈의 수첩 중에서


카뮈는 어머니의 깊은 시선 속에서 자신이 온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언어가 없는 곳에서도 사랑은 흐른다는 것, 그리고 그 말 없는 응원이 한 인간을 얼마나 단단하게 길러내는지를 카뮈는 고백합니다.


부재가 남긴 선물, 새로운 연결


흥미롭게도 『최초의 인간』은 이전 작들과 문체가 다릅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갼결한 문장 대신, 마치 터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듯 길고 구불구불한 문장들이 이어집니다. 퇴고를 거치지 못한 유고작이라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 문장들 사이에서 우리는 카뮈의 가장 연약하고 인간적인 속살을 마주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그는 ‘길 잃은 아이’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 빈자리는 스승인 베르나르 선생이나 에르네스트 삼촌 같은 또 다른 사람과의 인연과 연결로 채워졌습니다. 그들은 카뮈가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삶의 은인이자 조력자였습니다. 아버지를 찾아 떠난 길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재발견했듯, 상실은 때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곁의 소중함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최초의 길을 걷는 인간


책의 제목인 ‘최초의 인간’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없어 스스로 자신을 가르치고 낯선 길을 헤쳐나가야 했던 카뮈 자신을 뜻하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최초의 인간’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나지만, 결국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오늘’이라는 길을 맨몸으로 개척해야 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니까요. 앞서간 이들의 흔적을 좇으면서도 결국엔 내 발자국을 남겨야 하는 운명, 그것이 바로 인간의 위대함이자 슬픔일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를 보내고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가 길어진 요즘, 저는 매일 아침 어머니의 평안을 기도하며 깨닫습니다. 저 또한 누군가의 과거를 이해하려 애쓰는, 서툴지만 다정한 ‘최초의 인간’으로 성장해가고 있다는 것을요. 지금 이 순간, 각자의 황무지에서 생을 일구고 있는 모든 ‘최초의 인간’들에게 따뜻한 응원을 건네고 싶습니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년 11월 7일 프랑스령 알제리 몽도비에서 출생

1960년 1월 4일(46세) 프랑스 부르고뉴 욘주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

1935~36년 알제대학교에서 수학

작가, 기자, 철학자, 극작가로 활동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43세)

주요 작품: 『이방인』(1942), 『시지프 신화』(1942), 『페스트』(1947), 『반항하는 인간』(1951), 『전락』(1956), 『행복한 죽음』(1971), 『최초의 인간』(1994) 등



알베르 카뮈와 어머니(Catherine Sintés) 모습




표지 사진: 카뮈의 가족사진(앞 줄 가운데가 카뮈, 왼쪽 웃는 소년이 형, 어머니는 사진에 없음)




#알베르 카뮈 #최초의인간 #이방인#뫼르소 #실존주의 #노벨문학상 #시지프신화 #페스트 #알제리 #다정함 #부조리 #반항 #사랑 #지중해 #어머니 #인문학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