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신앙, 그리고 산사에서 배우는 삶의 이야기
3년 전 퇴직 이후의 삶은 한동안 낯설었습니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표가 비워지고 매일 반복되던 역할도 사라졌으니까요. 처음에는 홀가분함을 느꼈지만, 곧 공백과 허전함이 찾아왔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게 되는 시간이 늘었거든요. 돌이켜보면 바로 그 질문이 저를 변화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이후 빠져들게 된 인문학 공부, 올해 들어 시작한 가톨릭 교리 공부, 그리고 최근 다녀온 템플스테이까지, 서로 다른 길 같아도 결국 한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목표나 자리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 하루를 충만하게 채워가는 그런 삶의 모습입니다.
인문학 공부는 생각하는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자기 성찰과 인간의 본질에 관한 탐구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앞만 보고 달렸는데요.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해야 할 일은 쌓였고 살아남고 책임지기에 바빴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목표가 단순하고 분명했는데,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서 이제는 진짜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떠올리는 순간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은 삶을 바라보는 질문과 시선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장점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상하게도 그 순간 몰입감과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이지요. 자기 내면의 세계로 떠나는 인생 여정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성취보다 의미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걸 실감합니다. 소소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일로 하루를 채웠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지난 2월 말부터 아내와 함께 매주 동네의 성당을 다니고 있습니다. 인문학이 생각의 문을 열었다면 가톨릭 교리 공부는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는데요. 교리 공부를 시작하면서 저는 믿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해하기보다 의지와 믿음으로 채워지는 삶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이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실감하는 시간입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낍니다. 달리 특별한 일도 없는데 누군가의 등에 기댔을 때의 든든하고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신앙은 거창한 변화라기보다 삶을 조금 더 겸손하게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이 질문을 던졌다면 신앙은 내려놓음을 말합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생각과 믿음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완해 주는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주 춘천에서의 템플스테이 또한 색다른 느낌과 경험으로 다가왔습니다. 대학 강의를 마친 후 조용히 머물고 싶어 들른 곳이 소양강 상류에 있는 청평사였습니다. 산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니 도시의 소음과 사람의 발길이 점점 사라졌습니다. 청량한 봄날, 절 마당은 고요하고 자연스레 정적과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하룻밤을 머물며 특별히 한 일은 없습니다. 천천히 절 주변과 뒷산 길을 걷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책을 읽었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종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을 뿐입니다. 이런 단순한 시간이 마음을 비우고 정리하게 해 주는 걸까요. 짧은 시간이지만 오랜만에 보낸 자연 속의 하루는 저 자신과 오롯이 만나는 시간이 됐습니다. 비우면서 채워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날이었습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스님과의 차담 시간이었습니다. 어릴 때 불교와 전혀 관련이 없었던 스님은 스물네 살에 떠난 인도 여행이 인연이 되어 출가하셨다는데요. 제게 사람의 운명이란 무엇일까를 잠시 떠올리게 했습니다.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마음을 운전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게 주체적인 삶의 시작이라는 뜻이겠지요. 우리는 외부의 상황에 따라 흔들리며 살아갈 때가 대부분인데요. 과연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서두르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며 내 마음의 속도를 따라 사는 것, 바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가끔 찾는 템플스테이에서 저는 종교가 아니라 나를 돌아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삶의 지혜와 수행의 자세를 생각하는 날이니까요.
이 세 가지 여정은 결국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인문학은 생각하게 하고 신앙은 믿게 하며 산사의 고요는 조용히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더 이상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사는 삶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제 60대는 정리의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저 또한 ‘더 천천히’ 걷고 ‘더 깊이 있게’ 살고 싶어 집니다. 인문학이 던지는 질문, 신앙이 가르쳐준 겸손, 청평사에서 들은 스님의 말씀은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나를 돌아보는 질문과 성찰로 이어집니다.
퇴직 이후에는 삶을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보고 하루를 조금 더 충만하게 채워가는 게 중요합니다. 이제 저는 앞만 보고 서두르기보다 삶의 흐름을 음미하며 순간을 즐기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삶이 지금의 저에게는 무엇보다 좋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다정한 하루가 이어지기를 응원합니다.
*표지 사진: 춘천의 청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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