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 말고 경춘선 타면 드는 생각

by 김성일

이번 3월부터 대학 강의를 위해 춘천을 오가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은 호남선을 타고 광주의 대학과 어머니가 계신 나주를 다니곤 했는데요. 오랜만에 타는 경춘선은 무척 새롭고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기차를 타기 전부터 이미 ‘여행이 시작된다’는 감각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봄의 시내’라는 뜻을 지닌 춘천(春川)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문학적인 이미지를 품고 있으며, 여행을 자극하는 독특한 감성까지 불러일으킵니다.


경춘선은 기차여행이 주는 멋과 낭만의 대명사처럼 다가옵니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면 창밖으로 들과 산, 강이 차례로 펼쳐지고, 그 풍경 속에서 누구나 잔잔한 설렘에 빠지게 되거든요. 젊은 시절 한 번쯤 경춘선을 타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노선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청춘의 풍경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호남선과 느낌이 다른 이유


문득 호남선과 경춘선이 주는 이미지가 퍽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남선은 경부선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핵심적인 이동과 물류의 축이었습니다. 호남선 열차는 고향으로 향하는 귀성객, 혹은 생업을 위해 대도시로 이동하는 이들의 ‘삶의 무게’란 이미지가 강합니다. 고속열차가 도입된 이후에는 업무 출장과 같은 현실적 목적의 이동도 크게 늘었습니다. 저 역시 학업과 직장을 위해 호남선을 타고 남도에서 서울로 향했고, 명절마다 고향을 다녀오곤 했습니다.


반면 경춘선은 탄생부터 ‘유원지’와 ‘휴양’을 향하고 있습니다.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 등 주요 역들은 대학생들의 MT나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상징화되어 왔습니다. 경춘선을 탄다는 행위 자체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을 의미하게 된 셈입니다. 자전거 여행이나 산행, 강변 산책으로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이 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지요.


‘풍경의 미학’ 또한 크게 작용합니다. 호남선이 끝없이 펼쳐진 평야를 지나며 광활한 느낌을 준다면, 경춘선은 북한강을 따라 이어지는 수변 풍경이 중심을 이룹니다. 물을 곁에 두고 이동하는 경험은 마음에 정화와 이완의 감각을 가져다줍니다.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강줄기와 산세의 조화는 시각적인 리듬감을 만들어내고, 강변에 자리 잡은 오밀조밀한 마을의 풍경은 사람 사는 세상의 친근함과 다정함을 전해줍니다. 그 풍경 속에서 마음은 자연스럽게 포근해집니다.



공간에서 우리 인생의 ‘장소’로


오래 친숙했던 호남선에 이어 새롭게 경춘선을 이용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낯선 공간이 나에게 의미 있는 장소가 되기까지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또 살아오면서 내 삶을 형성한 장소는 어디였을까 하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최근에 읽은 이푸 투안(Yi-Fu Tuan)의 『공간과 장소』는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며 인문주의 지리학의 시야를 넓혀준 책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공간들이 ‘경험과 기억을 통해’ 비로소 ‘장소’가 된다는 그의 설명은, 일상의 이동마저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장소는 단순한 위치가 아니라, 삶의 이야기가 축적된 시간의 결과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하니까요. 책에 관해서는 차후 연재 글에서 자세히 살펴볼까 합니다.


우리는 매일 어딘가를 지나고, 어딘가에 머물며 시간을 채워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머무는 모든 공간이 곧바로 의미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 우리의 기억과 경험이 쌓여 애틋하고 그리운 감정으로 물들어야 합니다. 장소는 그렇게 우리와 인연을 맺고, 우리는 그곳에서 조금씩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지금 여기의 다정한 풍경


경춘선을 오가며 만들어가는 저의 경험은 마치 청춘 영화의 한 장면과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경춘선을 오가는 모든 이에게 똑같은 설렘과 경험이 찾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거기에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이야기를 더해가는 일입니다. 같은 풍경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다른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경춘선을 오가며 쌓이게 될 저만의 새로운 장소 경험이 더욱 기대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고 계신가요. 그곳이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여러분의 이야기가 담긴 따뜻한 장소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이 서로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삶을 견디게 하는 다정한 풍경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차여행 이미지: 코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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