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이동과 장소 인문학 이야기
이번 봄부터 두 가지 변화를 체감하고 있습니다. 대학 강의를 위해 매주 춘천을 오가고 있는데요. 지난 3년 동안 이용한 호남선에서 경춘선으로 갈아타고 보니 색다른 여행 기분에 휩싸여 지내고 있습니다. 청춘으로 돌아간 듯한 감회에 빠져들기도 하면서요. 춘천의 공지천과 학교에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처음의 낯선 느낌은 사라지고 마음도 점차 차분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2월 말에는 6년 만에 이사를 했습니다. 고층에서 살다가 저층으로 옮겼는데요. 고층에서는 멀리 하늘과 아파트 숲, 도로 같은 도시의 풍경이 주로 보였는데, 새집에선 거실 앞으로 작은 공원이 내려다보입니다. 여유롭게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때마침 벚꽃과 산수유가 활짝 피어 봄을 가까이에서 즐겼습니다. 4월 중순 들어 비가 두어 번 내린 사이 연둣빛이 점차 짙어지면서 잎이 무성해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장소가 우리 일상에 가져다주는 변화와 활력을 새삼 실감합니다.
최근에 읽은 이-푸 투안(Yi-Fu Tuan)의『공간과 장소(Space and Place)』가 떠오릅니다. 딱딱한 지리학이라기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건네는 다정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책입니다. 중국계 미국의 지리학자인 저자는 차가운 물리적 단위인 ‘공간’이 어떻게 인간의 숨결을 입어 ‘장소’로 변모하는지를 섬세하게 추적합니다.
우리는 매일 어딘가를 지나치고 어딘가에 머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머무는 모든 곳이 의미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사는 동네의 아파트 평수나 집값보다 장소가 인간에게 주는 경험과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장소 인문학의 관점에서 책이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나 텅 빈 새집은 ‘공간’이라는 말 그대로 비어 있는 곳이라, 우리에게 백지 같은 가능성으로 다가옵니다. 그곳은 아직 낯설고 썰렁해서 쉽게 정이 가지 않지요. 이 막연한 공간에 구체적인 경험과 시간이 더해지면 그제야 나만의 특별한 ‘장소’가 됩니다. 저자는 “공간은 자유를 의미하고 장소는 안정과 가치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공간이 장소가 되는 동력은 인간의 오감과 기억입니다. 새로 이사 간 집에서 처음으로 끓인 된장찌개 냄새, 아이가 벽지에 몰래 그려놓은 낙서, 창가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던 오후의 정적. 이러한 경험들이 하나씩 쌓일 때, 단지 숫자로 불리던 ‘○○아파트 ○○○호’라는 공간은 비로소 나만의 안식처가 됩니다. 제가 경춘선에 친숙해지고 막 이사한 낯선 집을 저의 집처럼 점차 편안하게 느끼는 것처럼요. 이처럼 인간의 경험과 감성, 이야기가 더해질 때 의미가 깊어진다는 사실이 바로 장소가 지닌 인문학적 가치일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장소를 외부에 있는 무언가로 생각하지만, 저자는 우리의 ‘신체’가 모든 장소 인식의 출발점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를 구분하며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이지요. 장소는 인간의 신체적 스케일과 감각을 통해 구조화됩니다. 하지만 장소의 깊이를 위해서는 시각 중심인 우리의 감각을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가 “시각은 우리를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지만, 촉각과 청각은 우리를 장소 안으로 끌어들인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할머니의 품에서 기억하는 포근함, 낯선 도시에서 느끼는 왠지 모를 친근함,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이런 감각들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그 장소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어떤 도시와 장소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면 바로 이런 뜻이겠지요. 우리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보다 그곳의 독특한 분위기와 다양한 체험적 순간을 더 오래 기억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장소애(Topophilia)’입니다. 인간이 특정 장소에 대해 느끼는 정서적 유대감을 뜻합니다. 인간에게는 익숙한 곳에 머물고자 하는 본능과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호기심이 함께 존재하는데요. 이러한 ‘장소애’는 삶 속에서 나만의 애틋한 감정과 기억의 원천이 됩니다.
장소는 인간의 정체성이 뿌리내리는 토양입니다. 수많은 시와 대중가요 속 ‘고향’은 단순히 태어난 곳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돌아가고 싶은 정서적 요람이자 근원적 동경의 대상이니까요. 반면 현대의 쇼핑몰이나 호텔, 공항 같은 곳은 ‘무장소성(Placelessness)’에 가깝습니다. 세련되고 편리하지만 어디서나 표준화된 공간이기에 특별하게 기억되진 않지요. 아무리 디지털 세상이 되더라도 우리가 인간적인 접촉이나 아날로그 감성에 빠져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를 통해 차가운 지도를 접고 마음의 지도를 그려보라고 권합니다. 장소에 산다는 것은 세계의 한 부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이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장소를 ‘자산 가치’나 ‘효율성’으로만 판단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의 마음과 손길이 머무는 다정한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걷던 밤거리, 비 오는 날 창밖을 내다보던 좁은 방이 세상 그 어떤 저택보다 더 넓은 ‘장소’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번 봄에 저 또한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경험의 이야기를 하나씩 채워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당신이 머물렀던 곳들은 어땠는지요. 바쁜 일상에서도 마음을 누일 ‘나만의 작은 장소’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곳은 단골 카페의 구석자리일 수도 있고, 손때 묻은 책상 앞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장소에서 따뜻한 날들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 표지 사진: 서울 이화여대 교정의 봄날. 아래는 남산의 하늘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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