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질주를 멈춰야 하는 이유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던지는 질문과 사색적인 삶

by 김성일

얇지만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책


“......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29)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는 2010년 출간 당시부터 현대 철학의 필독서로 자리 잡으며 우리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 책은 일단 두께가 얇아 부담 없이 접하기에 좋지만, 그 안에 담긴 생소한 철학적 용어와 개념들은 만만치 않은 무게로 독자에게 다가옵니다. 저 역시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짧은 문장들 사이로 흐르는 통찰에 몇 번이고 숨을 고르며 책장을 넘겼습니다.


사실 이 책은 다 읽고 난 뒤에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책이 던지는 질문들이 단순히 이론에 머물지 않고, 나의 일상과 삶을 무겁게 돌아보게 하며 깊은 성찰과 각성의 시간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라고 느끼게 되는 이 책의 핵심을 3가지 포인트로 짚어보고자 합니다.



1. '열심히'라는 이름의 함정, 자기 착취의 굴레


한병철이 제시한 ‘자기 착취’라는 개념은 처음 접했을 때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으나, 일상을 돌아보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진단임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의 규율사회가 금지와 억압을 통해 개인을 통제했다면,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무한한 긍정의 원리에 따라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만드니까요.


이러한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해서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남도의 산골에서 출발해 광주와 서울, 그리고 해외(영국)로 이어지는 여정을 살아오며 늘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믿어왔습니다. 서울에 처음 상경했을 때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유학 생활할 때는 언어 장벽과 낯선 환경 때문에 더 치열한 적응과 버티기 압박 속에 지냈습니다.


당시의 저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매사에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성실함의 이면에는 본능적인 생존 욕구와 상승의 갈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열심히 산다’는 말로 자기 착취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스스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비극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 성취의 기쁨 뒤에 숨은 ‘끝나지 않는 질주’


우리 사회의 압축성장과 과잉 긍정은 개인의 삶에도 그대로 투영됩니다. 저 또한 30년 넘게 공무원으로 생활하면서 정책 입안과 현장을 오가며 바쁘게 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문화산업 관련 업무를 맡았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밤을 새워 보고서를 작성하고 대폭 늘어난 예산을 집행하느라 쉴 틈이 없었거든요. 프로젝트가 하나씩 성과를 낼 때마다 동료들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나누곤 했어도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당시에는 IMF 직후 “국가적으로 새롭고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고양감에 취해 상당히 업(up) 된 상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도취감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면 축하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곧바로 다음 과제가 눈앞에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성취는 쉼표나 마침표가 아니라, 또 다른 치열한 경쟁을 알리는 출발선이 되어버리거든요. 우리는 성공의 기쁨을 충분히 만끽할 틈도 없이 다시 떠밀리듯이 앞으로 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누적되는 피로는 단순히 육체적인 고단함이 아닙니다.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긴장감, 그리고 내가 유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겹친 ‘영혼의 피로’입니다. 『피로사회』가 말하는 피로는 바로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치고 병이 드는, 현대 성과사회의 필연적 결과물일 지도 모릅니다.



3. 사색적인 삶, 멈춤을 통한 나의 회복


이 비극적인 피로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한병철은 ‘사색적인 삶’을 제시합니다. 이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주인공 길 펜더가 파리의 밤거리를 홀로 걷는 ‘산책자’가 되어 숨을 쉬는 모습이나, 영화 <패터슨>(2016)의 주인공이 버스를 운전하며 일상의 사소한 풍경에서 시적 영감을 길어 올리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세상에서 이들의 ‘멈춤’은 무의미한 낭비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길 펜더는 그 느린 걸음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묻고, 패터슨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타자와 사물의 아름다움을 하나씩 발견합니다. 이들은 모두 끊임없이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성과사회의 속도에서 잠시 내려와, 자신만의 리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와 <패터슨> 포스터


저 역시 그런 시간을 만들어보려 노력 중입니다. 카페에 앉아 멍하니 있거나 목적 없이 걸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내게 필요한 시간이다”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곤 합니다. 특히 점심 식사 후 ‘30분의 산책’은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평소에 조금만 틈이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게 되지만, 걸을 때만큼은 나와 세상을 잊고 주변 풍경 속으로 들어가게 되거든요. 길거리든, 공원이든, 하천길이든 잠시 멈추고 여유를 찾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마치며: 나를 향한 다정한 시선


결국 중요한 것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 속에서 숨 쉴 틈을 만드는 것입니다. 너무 열심히만 살다 보면, 정작 왜 사는지 이유조차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도시로, 다시 세계로 이어졌던 저의 지난 여정은 늘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집중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잠시 머무는 시간을 가지며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보곤 합니다.


“오늘 내가 살았던 그 ‘열심히’는 진정 내 행복을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성취라는 이름의 달콤한 보상 뒤에 숨어, 자신을 다음 출발선으로 너무 가혹하게 밀어 넣기 쉽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충만해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사색의 10분’을 갖는 것, 그것이 지친 나를 위한 다정한 마음의 시작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 당신의 마음은 안녕하신가요.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더 생산적인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다면, 잠시 창밖의 풍경으로 눈을 돌려보시길 권합니다. 그 짧은 멈춤의 순간에 자신을 향한 따뜻하고 다정한 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 표지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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