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자의 여유

- 동해안에서 운전하면 인생이 보인다

by 김성일

동해를 보며 달린다

시원한 바다, 쭉 뻗은 길을 따라

하늘은 높고 여름은 가깝다


차들이 씽씽 달린다

바람을 가르며 신나게 나를 추월한다

금세 멀어지는 차

바짝 뒤로 또 다른 차가 꼬리를 물며 간다


어느샌가

내가 제일 느리구나


언제던가

아우토반에서 200을 찍으며 질주하던 남자,

보인다


머리털이 쭈뼛 서며 엔도르핀이 슝슝 폭발하던

2000년 봄 어느 날


그런 날이 있었구나. 까마득한


서른여덟, 내 인생은 그때 리즈였을까

펄펄 날아다니던 젊음이었구나


한잔이 새벽까지 이어지고

아침에 출근해선 종일 또 일했지

점심엔 시원한 속풀이 한 그릇 비운 채,

청진동 해장국, 부산뽈데기, 안성또순이

모두 그립다


오늘은 동해안까지

제 길 따라 흐르는 물처럼,

멀리도 왔구나


앞서가는 차

신나게 달리세요

느린 저를 제끼고 기분 좋게 밟으세요

요리조리 쭈~욱 빵빵거리면서요


이제 급할 게 뭐 있나요

시간도 많고요

전 아무런 질투가 없답니다


천천히 오래도록

지금 이대로가 좋아서요


저 바닷가에 멈추면

보드랍게 서걱대는 모래 맨발로 지그시 밟아 보고요

걸음이 끝나는 어디쯤 카페에서

차 한잔 두고 책을 읽어도 좋지요


수평선이 보이는 언덕이라면

적당한 데 기대고 멍 때리기는 어떨지


서울로 돌아가면

그 시절 동지들 만나

한 번쯤 추억에도 젖어 보고 싶어요


비 오거나 바람 부는 날엔

막걸리나 한잔 부딪치면서,

광화문에 가면 열차집이나

간판 없는 김치찌개 집 같은 데 딱 좋지요


살다 보니 느린 게 익숙해져요

몸으로 아늑하게 스며드는 게 이렇게 좋다니

평생 천천히 물들어가면 어떨지요

불현듯 궁금해져요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문득 뒤에 남은 느림보가 이렇게 여유 만만해진 까닭이


눈은 더러 멀리 가더라도

마음은 그저 여기 머물러 있거든요





관동팔경의 하나인 울진의 망양정에서 바라본 동해안 풍경, 멍 때리기 딱 좋은 곳이다.
인사동길의 간판 없는 김치찌개집(다시 보니 간판은 있는데 이름이 없다). 어묵이 푸짐하게 들어간 김치찌개가 묘하게 맛있다. 점심시간이면 기다리는 줄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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