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 아닌 고생이면, 이 나쁜 기분도 내 것이 아니었으면.
친구와의 약속이 있는 시간에 나는 직장에 출근해 있었다. 이 시간에 입기 위해 미리 골라 놓은 옷은 집에 있고, 나는 일을 할 때 챙겨 입는 복장을 갖추고 내가 맡은 자리에 있었다.
전날의 나는, 상사로부터 통보를 받았다.
“내일 야간 연장근무를 해야 하는데, 그 쪽 팀에 결원이 생겼다.” 그렇다고 한다.
일하고 있는 부서에서 내가 있는 팀의 업무를 분할해 같은 업무를 하는 다른 팀에 결원이 생겼다고 한다. 회사의 일은 돌아가야 하는데, 한 친구가 월차를 써, 인원이 부족하다고 했다.
내가 받은 통보는 그 팀에 가서 일을 도우라는 내용이었다. 어쩌겠는가. 내가 못 간다고 하면 그 날의 일은 공친다고 하는데.
친구들과의 약속은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보고 싶어서 애써 참석하겠다고 약속하고, 며칠 전까지 근무일정을 확인하고 재확인했지만, 어쩔 수 없지. 이런 일인걸. 일을 하는 동안 띠링하고 울리는 핸드폰 알림을 확인해 보니 만나기로 한 친구들 사이의 단톡방에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일찍 도착했다. 미리 도착했다. 길이 막힌다. 음식을 주문했다. 음료는 커피 말고 다른 것을 했다. 나 말고 다른 모든 멤버들이 모이고 나서도 채팅창에는 글이 올라왔다. 의도는 명확했다. 나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음식을 먹고 있다.’ ‘우리는 지금 여기로 옮겼다.’ ‘우리는 지금 한 잔 하는 중이다.’ 그렇군. 재밌겠군.
부러움이 충분히 밀려와야 함에도 나는 부러움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러기에는 몸의 피로가 너무 컸고, 스트레스가 충분히 지나쳤다.
야근이 힘든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잠에 들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피로와 고통이 그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런 이유들을 포함해 야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나 자신에게 납득시킬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겠지. 그래서 유난히 더 힘들었던 것이곘지.
내가 대신 출근해야하는 이유인 어린 직원은 월차나 기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매주 쉬는 날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까지 해서 그 친구가 하려는 일이란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이란다. 여자친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직장과 동료들에게는 전혀 나누어 주지 않는 야박한 이 친구는 어떤 주엔 웬일인지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맞춰 퇴근을 하더라. 게다가 야근에도 도망가지 않고 일하는 동안 자리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듣기론 여자친구와 싸웠었다고 한다. 어느 새 우리 부서의 모두는 그 친구의 연애 진행 정도를 다 알고 있다. 이번 주엔 싸웠네. 다음 주엔 어디에 여행을 가네. 어느 달엔 어느 나라로 갔었네. 어느 달 어느 주엔 며칠 정도를 함께 있었네.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사라진 직원 때문에 평소 보다 더 늦은 시간까지 그 빈자리를 메꿔야 하는 날. 이 날은 어떤 종류의 기운이 끼었는지 별 일들이 일어났다. 먼저 과장은 업무 중에 먹을 식사를 결재 받아두지 못했다. 일이 밀리고 밀린 상태라 간단하게 도시락 같은 것으로 끼니를 해결한 후 다시 일에 돌아와야 하는데, 그런 식사가 사라졌다. 그보다 여자친구 때문에 사라진 직원의 구멍을 메꾸는 것을 깜빡해, 일을 메꿔야 하는 하루 전날에야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부분도 있다. 게다가 과장은 다시 업무 시간도 착각해 버렸다. 결국 나와 몇몇 직원은 할당된 업무량이 끝난 다음에도 수당에 포함되지 않는 한 시간을 넘게 더 일을 해야 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대신하고, 끼니를 놓친 채 오랜 시간 일에 잡혀 있고, 다른 모든 부서가 퇴근한 후에도 업무 종료 시간을 잘못 계산한 과장으로 인해 하지 않아도 되는 추가적 노동으로 잡혀 있었던 시간. 이 시간을 거친 뒤의 나는 정신적으로 마모되어 있었다. 회사 생활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인걸. 납득이 가지 않는 일들이고. 올바르게 돌아가지 않는 일인 걸. 규칙대로 이루어지고, 규정대로만 이루어진다면 그런 곳을 왜 회사라 계속 부를까. 천국이라 하겠지. 어쩔 수 없이 그런 곳이 직장이라는 생각을 해야만 직장을 버텨낼 수 있는 것일까. 때로는 불합리를 불합리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걸. 회사만 그런 것은 아니지. 세상 또한 수많은 불합리와 부당함으로 가득 차 있다. 어차피 그런 것인 줄 알면서 살아가는 것, 그런 게 삶인 걸.
집에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높이 솟은 아파트에는 아직 켜져 있는 불빛이 보이지만 길에는 어떤 사람도 없다. 모두가 잠들었고, 잠든 것이 당연한 시간. 그런 시간에도 켜져 있는 편의점.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먼저 들러 본다. 이런 날에는 경제적 관념, 자기 관리. 그런 것을 버려야 해. (그래야 살아.)
“좋아.”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 편의점 직원의 인사에 화답하며 거침없이 쓱 들어간다. 찰랑. 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일곱열하나의 편의점의 가장 안쪽 벽 구석엔 맥주 칸들이 있다. 한 칸은 한국 맥주 칸 다른 한 칸은 수입 맥주 칸. 편의점에 들어오면서 계산대 앞에서 하나 들었던 바구니에 맥주를 담는다. 하나, 둘, 또 하나. 안줏거리도 골라볼까. 아니 집에 케이크가 있지. 그러고 보니 콩나물 해장국을 끓일 재료가 있다. 요즘 나는 콩나물 해장국에 꽂혀 버렸거든.
집으로 올라오는 길은 일하러 나갈 때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든 채였지만, 기분은 그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굉장히 좋다거나 그렇진 않아.” 다른 직원이 데이트하러 놀러간다는 이유로 생긴 빈자리를 메꾸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왔으니. 그래도, 새벽 공기를 충분히 마시고 나서인지, 회사에서 막 나왔을 때보다는 마음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니.
“이 맥주들을 다 마시면 될 정도?”
좋아. 어차피 내일은 쉬는 날. 체력이고 뭐고. 컨디션이고 뭐고. 내일 있을 약속이고 뭐고. 지금 손에 든 알코올에 안줏거리를 다 먹어 치우기 전엔 눕지 말자. (그럴 때가 있지. 이런 게 필요한 때.) (그렇지.) 그 녀석, 충분히 미워하면서, 충분히 게을러져 볼까.
에라이, 어서 결혼 같은 거나 해버려라. 연애한답시고 쏘다니지 말고. (축의금은 잊지 않고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