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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융한삶 Jun 11. 2024

평균의 종말




[아이큐] 


2015년 겨울, 웩슬러 지능 검사 4판은 15개 항목(BD, SI, DS, MR, VC, AR, SS, VP, IN, CD, LN, FW, CO ,CA PCm)을 측정했고, 이를 통해 언어이해, 지각추론, 작업기억, 처리속도를 산출했다. 검사 시간은 대략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내 최종 아이큐는 118이었다. 


그러나 이 수치만으로 좋다·나쁘다, 똑똑하다·우둔하다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언어·어휘·순발력과 관련한 언어이해, 작업기억, 처리속도가 높은 편이었지만, 공간·수학과 관련한 지각추론 능력은 낮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재검사를 한다면 플린 효과에 의해 내 아이큐는 130이 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높다·낮다를 단정할 수 없다. 지금은 그때보다 어휘력과 문해력은 늘었겠지만, 수학과 나 사이에는 더욱 크고 견고한 벽이 생겼기 때문이다. 






[평균이라는 신화] 



1. 발생 동기 


평균주의는 이상적, 이타적, 공리주의적 기반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의적, 속물적, 편파적 야망에서 시작됐다. 을사오적이 그랬듯, 테일러, 손다이크, 골턴, 케틀레, 게젤, 몰레나는 그저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저열한 야욕으로 계획을 추진했다. 



2. 전파 과정 


비록 동기와 목적이 이기적이고 불순하더라도, 결과가 다수에게 이익이 됐다면 별 문제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상은 공교롭게도 산업혁명과 맞물려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그로 인해 천편일률적 획일화가 교육·사회계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 영향력은 여전히 공고하다. 



3. 오류

 

무엇보다 애초부터 잘못된 전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현대인들을 괴롭히고 있다. 



3-1. 

평균에 가까울수록 이상적이라는 오류. (노르마) 


플라톤은 평균을 이데아라고 하지 않았다. 현실계에 ‘노르마’, 즉 가장 ‘이상적’이고 ‘적합한’ 형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식물의 뿌리 길이, 가지 굵기, 잎의 넓이를 수치화 해서 평균을 내면 가장 아름다운 나무가 될까? 모든 개의 발바닥 크기, 눈동자 색깔, 다리 길이를 평균 내면 가장 아름다운 짐승이 될까?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3-2. 

하나가 뛰어나면 전부가 뛰어나다는 오류. (탈리도마이드) 


마이클 펠프스가 축구를 잘 할까? 리오넬 메시가 농구를 잘 할까? 마이클 조던이 골프를 잘 칠까? 타이거 우즈가 그림을 잘 그릴까? 파블로 피카소가 주짓수를 잘 할까? 카를로스 그레이시가 주식을 잘 할까? 워렌 버핏이 힙합을 잘 할까? 빈지노가 게임을 잘 할까? 페이커가 춤을 잘 출까? 영제이가 요리를 잘 할까? 백종원이 수영을 잘 할까?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알고 있는가? 탈리도마이드는 1950년대 임신부를 위한 입덧 방지제로 50여 개국에서 판매됐다. 쥐, 개, 돼지, 원숭이에게 아무런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아 신의 선물이라 불렸으나, 결과적으로 당시 이 약을 먹은 임신부들은 약 8만 명의 아이를 유산했고, 2만 명이 넘는 기형아가 태어났다. 


유추는 ‘귀납적’이다. 즉, 전제가 참이라고 해서 결론이 반드시 참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가 뛰어나면 나머지 전부가 뛰어나다는 확정은 잘못된 유추의 오류다.

 


3-3. 

그룹 전체의 평균으로 개개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오류. (에르고딕) 


대학 간판은 일종의 명함이다. 매우 간결하고 경제적으로 어떤 사람을 파악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명함만으로 개인 역량과 여러 지능을 한꺼번에 설명하기는 힘들다. 


만약 이 전제가 적절하다면 서울대 출신 범죄자는 한 명도 없어야 한다. 입학하려면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해야 하므로, 최상위 도덕성과 고매한 인격 역시 갖춰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대 범죄’를 검색하면 셀 수 없이 많은 범죄들이 검색된다. 즉, 높은 시험 등급이 개개인의 도덕성, 인간성, 사회성, 인지지능, 정서지능, 사회지능, 공감능력 등을 효과적으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방증이다.  






[마쉬멜로 테스트] 


이 실험은 눈앞의 이익을 즉각적으로 취하지 않고,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지 여부, 즉, ‘자기절제력’, ‘자기조절력’, ‘만족 및 보상 지연 능력’을 성공의 핵심으로 꼽는다. 


하지만 이 테스트 역시 무선배치실험(RCTs : randomized controlled trials)이 아닌, 하나의 역학 조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온전히 신뢰할 수 없고, 실험 설계자들의 소망에 따라 결과 방향이 의도적으로 조종됐음을 인정해야 한다. 


오히려 실험 결과가 ‘자기절제력’, ‘자기조절력’, ‘만족 및 보상 지연 능력’이 아니라, 피실험자를 둘러싼 환경(신뢰할 만한 어른, 실험실 분위기, 양육자와의 관계)에 좌우된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2002년은 비교적 체벌이 자유로웠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선생님은 자주 ‘손 들고 눈 감아’를 시킨 채 외출했었다. 만약 한 명이라도 눈 뜨거나 손 내리는 경우엔, 집에 보내지 않겠다는 으름장도 잊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가면 이내 아이들은 실눈을 뜨고 손을 내리고, 교실은 다시 소란해졌다. 나는 성실하고 소심한 쫄보이며, 권위에 기꺼이 복종하는 범생이였기 때문에 절대 손을 내리거나 눈을 뜨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자세를 엄격하게 지켰다. 괜히 마지막 순간 긴장을 풀었다가, 이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을 수는 없었다. 선생님이 돌아와서 나 하나만 칭찬하고, 나머지 전부를 벌 주기를 기대하면서 인내하고 버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팔이 저릴 때쯤, 마침내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잔뜩 기대했다. 다들 남아서 혼나는 동안 유유히 혼자 집에 갈 생각에 들떴다. 


선생님이 말했다.


‘나 급한 일 생겨서 나가봐야 하니까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반장, 인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애들은 저마다 웃고 떠들며 짐을 쌌다. 


개새끼...


세상에 대한 선명하고 견고한 불신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마시멜로 테스트로 치자면, 

나는 절제나 자기 조절과는 거리가 먼 낙제생이 되었다. 


우선,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았다.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절대로 일반 회사에 입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숨막힘을 감당하고 싶지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졸업 학기에도 면접 대비 양복 한 벌 없었고, 자기소개서를 써 본 적도, 토익을 공부한 적도, 응시한 적도 없었다. 졸업하려면 일반적으로 토익 점수가 필수였는데, 나는 다른 방법(영어 발표수업 B학점 이상 이수, 취업증명 제출)을 찾아 졸업했다. 


나는 만족스러운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었다.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반항’하는 인간만이 가치 있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자주 반항했다. 

심리학을 전공하면서도 철학과 국문학을 기웃댔고, 남들 취업 준비할 때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지금도 일반적인 형태로 근무하지 않기에, 

평균 기상 시간에 일어나지 않고, 평균 출근 시간에 근무하지 않고, 평균 퇴근 시간에 귀가하지 않는다. 


여전히 비혼을 추구하고, 자동차도 없고,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평균’적인 노선에서 벗어났기에 삶이 불안할까? 

오히려 태풍의 눈처럼 평온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와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더 이상 스스로와 대화하지 않고, 마음 속 목소리에 귀를 닫았을까? 


고대 인도에는 출가자가 많았다. 이들은 진리와 마음의 평화를 찾아 속세를 떠났다. 점점 출가자 비율이 많아지자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국가 재정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정부는 안정적으로 세금을 걷어 국가의 붕괴를 막기 위해, 구도求道 행위를 엄격히 제한하고 통제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국민들을 세뇌했다. 진리 따위는 없다고, 뜬구름 잡지 말라고, 자유는 위험하고, 예술은 가난하다고, 가난은 불행하며, 현실을 직시하라고, 눈앞의 생활에 충실하라고. 


현대 사회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창의성을 배척한다. 국가는 개개인을 예술가의 씨앗으로 여기지 않는다. 튼튼한 톱니바퀴로써 문제없이 작동하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계속 프레임을 씌운다. 어려운 용어를 생산하고, 계급을 구분 짓고, 아비투스를 양극화하고, 자꾸 겁을 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설득당한다. 용기를 잃고, 정해진 선로만을 따라야 한다고 순응한다.  






[평균주의에서 살아남기] 


평균주의 속에 질식당하지 않기 위해서 몇 가지가 필요하다. 적당한 이기심, 내면 목소리에 귀 기울일 용기, 외부 비교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쿨함. 


이런 조건들은 장착하기도 유지하기도 쉽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몸에 두르고 자주 휘둘러야 한다. 


어느정도 숙련도가 쌓이면 비로소, 편안한 자유가 시작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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