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

by 조융한삶





새장 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 다리가 굵어지고 튼튼해져서

닭처럼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가끔, 창살 사이를 채우고 있는 바람을

부리로 쪼아본다, 아직도 벽이 아니고

공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김기택, 「새」






나는 현대인들의 얼굴에서 이 새를 본다. 날개를 잊은 것이 아니라 날개가 무엇인지를 잊은 얼굴들. 현대인은 모든 풍족을 누리기에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 스마트폰, 노트북, 무제한 데이터, 24시간 편의점, 배달 앱. 원하는 것은 클릭 한 번으로 도착하고 욕구와 불편함은 즉시 해소되며 고통과 역경은 회피해야 할 장애물로 취급되는 세계. 현대 사회는 모든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든다. 위험은 안전으로, 고통은 마취로, 불편은 편의로 대체되고, 우리는 부드러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몸은 편해졌지만 근육은 약해졌고, 안전해졌지만 무감각해졌다.


그리하여 영혼은 갈증에 시달린다. 메마름, 피곤함, 나약함, 초라함, 목이 졸리는 느낌, 입에 재갈을 물린 느낌 등. 정신적 고향은 약탈당하고 방화되었고, 본능은 퇴화되었다. 문화라는 테두리 속에 갇힌 갈망, 허울을 쓴 피조물의 삶.


선함과 무해함은 다르다. 선함은 의지적 선택이지만 무해함은 비자발적 거세다. 송곳니를 감춘 것과 송곳니를 뽑힌 것은 전혀 다른 상태다. 현대인에게는 송곳니가 없다. 송곳니를 본 적도 없고 무엇인지도 모르니, 물 수도 없고 물지 않는 법도 배울 수 없다.


야성이 거세된 세상. 현대 사회는 정교한 새장이다. 월급이라는 모이, 보험이라는 횃대, 연금이라는 물통이 우리를 가두고, 그 안에서 우리는 걷는다, 부지런히,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새장 문은 열려 있다. 하지만 아무도 날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남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최초의 여성 이름 'Eva'는 늑대를 뜻하는 고대어 'woe'와 연결되어 있다. 영어 'woman'의 어원 역시 같은 뿌리다. 늑대, 야성, 원초적이고 신성한 어머니 원형. 여성은 태고부터 야성과 함께였다. 하지만 문명은 이 야성을 억압하고 여성에게서 늑대를 빼앗았다. 그리고 순종을, 온순함을, 무해함을 강요했다. 그래서 오늘날 여성들 역시 영적 기아 상태에 시달린다.



결핍이 결핍된 시대. 고통이 제거된 삶.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썼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우리는 알 속에 있다. 문명이라는, 안전이라는, 편의라는 알. 알을 깨는 것은 고통이기에, 우리는 알 속에 머문다.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


이 글은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 『파이트클럽』과 잭 런던의 소설 『야성의 부름』을 통해 현대인의 야성 상실과 그 회복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융의 '그림자'와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경유하여, 개가 늑대를 만나는 이야기, 에고가 이드 혹은 그림자와 대면하는 이야기를 따라간다.








개성은 취향에서 시작된다. 취향은 가치관의 누적이고, 가치관이 축적되려면 의미있는 경험이 필요하다. 의미있는 경험은 고통을 수반하고, 고통을 적절히 인내했을 때 비로소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축적된 가치관은 정체성이 되고, 정체성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반면 차이없음은 대체가능성을 뜻하고, 대체가능성은 고유성의 소멸을 야기한다. 따라서 차이는 저항의 시작이며, 차이없음은 순종과 굴복을 낳는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파이트클럽'의 주인공 잭은 무색무취의 직장인이다. 잭은 IKEA 카탈로그를 뒤적이며 취향을 수집한다. 란스카 소파. 89,000원. 요한네스부르크 책상. 149,000원. 비스만 조명. 49,000원. 공허를 달래줄 거라 믿으며.


아파트는 완벽해진다. 하지만 그는 잠들지 못한다. 의미의 상실, 영혼의 갈증. 부자연스러운 리듬에 맞춰 사는 삶. 파괴된 잠재의식. 본성은 까맣게 잊은 존재. 공허라는 병에 시달리는 그는 밤마다 암 환자 모임을 찾아간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안아준다. 그도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운다. 그래야만 잠들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만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낀다. 죽음 앞에서만 삶이 보이는 역설.



잭 런던의 소설 '야생의 부름'의 주인공 벅도 비슷한 처지다. 캘리포니아 판사의 저택에서 벅은 완벽한 개였다. 주인이 부르면 달려갔고, 주인이 쓰다듬으면 꼬리를 흔들었다. 넓은 정원, 따뜻한 벽난로,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것이 벅의 세계였다. 평온하고 무해한.


하지만 알래스카로 끌려간 후, 벅은 '곤봉의 법칙'을 배운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휘두르는 곤봉. 맞을 때마다 벅은 배운다—복종하라, 저항하지 마라, 살아남으려면 순종하라. 안락함에서 가혹함으로. 정원에서 설원으로.


현대인은 매일같이 곤봉을 맞는다. 학교, 직장, 사회. 보이지 않는 곤봉. 출근하고, 보고서를 쓰고, 참고, 미소 짓는다. 그것이 생존이니까.



융은 이것을 '페르소나의 비대화'라고 불렀다. 가면이 얼굴을 삼킬 때. 현대인은 완벽한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 속에서 자신을 잃어간다.


니체가 말한 낙타의 단계.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동물. 순종하고 참고 견디는 존재. 낙타는 묻지 않는다—왜 이 짐을 져야 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가. 낙타는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의무. 책임. 규칙. 대부분의 현대인은 낙타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한다. 그것이 어른의 삶이니까. 그것이 정상이니까.


야성을 잃고 송곳니를 뽑힌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야성의 거세를 "성숙"이라 부른다. 공격성 제거를 "사회화"라 부르고, 순종 학습을 "적응"이라 부른다. 하지만 송곳니를 뽑힌 늑대는 더 이상 늑대가 아니다. 가축이다. 무해하게 길들여진, 마치 묶여있는 개처럼.






늑대


비행기 안에서 잭은 타일러 더든을 만나고, 며칠 후 그의 아파트가 폭발한다. 모든 것이 재가 된다. 란스카 소파, 요한네스부르크 책상, 비스만 조명. 완벽하게 꾸며놓은 삶 전체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타일러에게 전화한다. 술집에서 만나 술을 마신 뒤 주차장으로 나간다.


타일러가 말한다.

"나를 때려."


주먹이 타일러의 귀를 짓이긴다. 연골이 무너지는 감촉. 뼈가 물렁한 것을 뚫고 들어간다. 피가 터진다. 주차장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기름때 위로 번진다. 붉은색과 검은색. 섞이지 않는다. 물과 기름처럼 따로 흐른다.


타일러도 잭을 때린다.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머리 안에서 울린다. 콘크리트 바닥에 뺨이 닿는다. 차갑다. 자갈이 뺨에 박힌다. 주차장 바닥에서 뒹군다. 피투성이가 된다. 피가 입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철 맛이 난다. 하지만 콧속에서 나는 피 냄새는, 이상하게도, 달콤하다.


언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명했던가.


타일러는 말한다.

"우린 그 누구보다 강하고 똑똑하다. 한데 그 능력이 말살되고 있어. 우린 목적을 상실한 역사의 고아야."


그날 밤 잭은 약 없이 잠든다.



벅도 알래스카의 첫 밤, 다른 개들과 싸우며,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렸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매질을 당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살아있음을.


밤이 되면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깊은 심연의 노래. 태고의 기억이 깨어난다. 조상의 기억이. 억압된 본능이. 잊혀진 송곳니가.



융의 '그림자'는 우리가 의식에서 배제한 모든 것—공격성, 욕망, 야성—을 가리킨다. 억압된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돌아와 대가를 치른다.


타일러는 잭의 그림자다. 잭이 억압한 모든 것, 사회가 거세한 모든 것, 문명이 뽑아버린 송곳니. 잭이 순종할 때 타일러는 반항하고, 잭이 참을 때 타일러는 폭발한다. 개와 늑대. 에고와 그림자.


암환자 모임에서는 타인의 죽음을 훔쳤다. 빌려온 슬픔과 공포. 하지만 파이트클럽에서는 자신의 고통을 겪는다. 관람석과 링 위의 거리. 관람석은 안전하다. 다치지 않는다. 하지만 링 위에서는 다르다.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 손등에 묻은 피, 입안의 흐르는 철 맛은 진짜다.



조던 피터슨은 용과 금의 이야기로 설명한다. 용은 금을 지킨다. 모든 신화가 그렇다. 원하는 것, 가장 귀한 것은 언제나 위험이 지키고 있다. 보물을 얻으려면 용에게 맞서야 한다. 그러나 예의와 도덕으로는 용을 물리칠 수 없다. 먼저 괴물이 되어야 한다.


영웅 신화는 하나같이 같은 것을 말한다. 선한 자는 무엇보다 먼저 악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능력 없는 선함은 선이 아니라 그저 무능이다. 무해한 것은 선하지 않다. 그저 무해할 뿐이다. 토끼는 선하지 않다. 토끼는 위험하지 않다. 송곳니가 없고 발톱이 없다. 선택이 아닌 그저 무력함.


반면 괴물이지만 괴물처럼 행동하지 않을 때, 그때 비로소 선할 수 있게 된다. 폭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을 때. 파괴할 수 있지만 절제할 때. 그것이 진정한 덕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힘부터 갖춰야 한다. 그제서야 협상할 수 있다. 그래야만 경계를 그을 수 있다.


피터슨의 심리치료실에는 "너무 착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대부분 여성이다. 오랫동안 억압받고 무기력에 길들여진 사람들. 그들은 협상할 줄 모른다. "노"라고 말할 줄 모른다. 경계를 그을 줄 모른다. 갈등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늘 패배한다. 착취당하고, 이용당하고, 분노를 삼킨다. 무력감. 불안. 앞을 가로막힌 느낌. 머뭇거림. 불면증.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착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늑대를 깨우는 것이다. 거절할 수 있는 송곳니, 싸울 수 있는 발톱, 긍지와 위엄, 천부적 자유의 회복.



파이트클럽이 시작된다.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억압된 만큼 폭력을 갈구하는 남자들. 낮에는 은행원이고 밤에는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남자들, 낮에는 웨이터이고 밤에는 누군가의 코뼈를 부러뜨리는 사람들. 낮의 순종함만큼 밤의 폭력성이 커지고 억압의 강도만큼 분출의 강도가 세진다.


폭력을 통해 질서를 배운다. 규칙이 있다. 시작과 끝을 아는 것. 언제 송곳니를 드러내고 언제 감추는지 아는 것.

남자들은 파이트클럽 밖에서 더 예의 바르게 된다. 길에서 마주치면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존중하며 양보한다. 상호허겁.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폭력적이지 않다. 송곳니가 있기 때문에 물지 않는다.


개는 송곳니가 없어서 물지 못하지만, 송곳니를 되찾은 개는 다르다. 위해를 가할 수 있지만 절제한다. 악할 수 있지만 제어한다. 폭주할 수 있지만 통제한다.



며칠 또는 몇 주가 지난다. 잭은 변한다.


태초의 기억이 돌아온다. 삐걱거리던 정신의 뼈가 다시 맞춰진다. 야성의 불씨가 타오른다. 원초적 신성의 점화. 깊은 내면의 문이 열리며 골수에 적혀있던 것이 깨어난다. 직관. 강인함. 지구력. 용기. 이글이글한 생명력. 우아한 생기. 창조적 에너지. 불멸의 정신. 훼손되지 않은 생명의 열쇠. 무의식의 씨앗과 뼈. 삶을 조정하고 존재의 핵을 이루는 영혼의 심장.


불면증이 사라졌다. 암 환자 모임도 더 이상 필요 없다. 내면의 리듬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사자. 니체의 두 번째 단계.


사자는 "나는 원한다"고 말한다. 더 이상 짐을 지지 않는다. 더 이상 순종하지 않는다.


어느 날 밤 타일러는 잭의 손등에 화학 약품을 붓는다. 피부가 녹기 시작한다. 잭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뿌리치려 하지만 타일러는 그의 손을 잡는다.


타일러가 말한다.

"피하지 마. 이건 니 고통이야."


손등의 피부는 계속 녹아내린다. 흰색 거품이 인다. 살점이 드러난다. 피부가 녹으면서 붉은색 액체가 끓듯 부글거린다. 손등에 흉터가 남는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낙인이 아니다. 증표다.


벅은 야생에서 사냥하는 법을, 싸우는 법을, 죽이는 법을 배웠다. 매일 밤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고, 벅은 그 소리를 따라갔다. 점점 더 깊이. 점점 더 멀리. 문명에서 멀어질수록 벅은 강해졌다.


잭은 야생을 안으로 들인다. 송곳니를 되찾되, 그것을 감춘다. 필요할 때만 드러낸다.


개는 늑대를 만났다. 에고는 그림자와 대면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


어느 날 타일러가 사라진다. 잭은 타일러를 찾아 전국을 다닌다. 모든 도시에 파이트클럽이 있고 모든 파이트클럽에 타일러가 있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타일러는 별개의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잭 자신의 분열된 인격이자, 억압된 욕망이 형상을 입은 존재. 늑대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었다.


그림자는 이렇게 작동한다. 우리가 의식에서 배제한 것은 무의식으로 내려간다. 개인무의식, 억압된 욕망과 공격성이 쌓이는 곳.


그곳에서 그림자는 독자적인 힘을 얻는다. 더 이상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잭은 타일러를 만들었지만 타일러는 잭의 통제를 벗어났고, 이제 타일러가 잭을 지배한다. 통합되지 못한 그림자는 자아를 삼킨다.


잭은 총을 들어 타일러를 겨눈다. 그러나 타일러는 자신이기에 결국 총구를 자신의 입에 댄다. 차가운 금속과 화약의 냄새. 손등의 흉터가 쑤신다.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린다. 총성이 울린다. 뺨이 찢어진다.



개와 늑대의 시간. 프랑스어로 "Entre chien et loup".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기 직전, 개와 늑대를 구분할 수 없는 시간. 빛과 어둠 사이. 문명과 야생 사이. 에고와 그림자 사이.


그리고 그림자 너머에는 더 깊은 층이 있다.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 개인의 경험을 넘어선 곳. 시간의 끝이자 세계의 언저리. 이백만 년의 역사가 쌓인 곳. 심리적 유산. 원형적 패턴. 인류 공통의 하부구조. 사이코이드 무의식. 육체세계와 정신세계가 만나는 곳. 육체와 심리가 한데 섞이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곳. 두 세계 사이의 세상. 세상의 갈라진 틈. 강 밑의 강.


늑대의 원형이 거기 있다. 벅이 듣는 늑대 울음소리는 단지 억압된 개인의 기억이 아니다. 인류의 기억이다. 태고의 부름이자 깊은 심연의 노래.



벅은 이 시간을 거쳐 완전한 밤으로 갔다. 존 손튼이 살아있을 때, 벅은 낮에는 충실한 개였고 밤에는 늑대 무리와 함께 달렸다. 두 정체성 사이를 오갔다. 하지만 존 손튼이 죽자 벅은 완전한 늑대의 길을 선택했다. 더 이상 개로 돌아오지 않았다.


반면 잭은 이 시간에 머문다. 개도 늑대도 아닌 시간. 잭은 사회 속에 살아간다. 먹고 살아야 할 직장과 아파트, 지불해야 할 청구서가 있다. 완전한 늑대가 될 수 없다. 그랬다간 감옥에 갈 테니.


그래서 이 시간에 머문다. 안전하지도 않지만 위험하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딘가. 하지만 그것은 비굴한 애매함이 아니다. 균형이며 주체적 긴장이다. 늑대를 내면에 기르되 개로 살아간다.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의도적 고독을 선택하며. 매일 아침 깨어나 선택한다. 오늘도 이 시간에 머물겠다고.


'그림자 통합'—그림자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 내 안의 공격성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되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파이트클럽은 그림자를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의식이고,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것을 그늘 위로 꺼내는 작업이었다.


야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거칢을 되찾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피조물 본연의 건전한 한계를 온전히 지켜나갈 수 있는 자연의 생활방식. 자신의 늑대를 되찾아 완전한 인간으로 복구되는 것. 본능과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 울창한 야성의 숲으로 돌아가 불변의 지혜를 되찾는 것. 원형을 해방하는 것.



니체는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ärker.)


물론 모든 고통을 감내할 필요는 없다. 부조리한 고통은 거부해야 한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이것을 목격했다. 같은 고통 앞에서 어떤 사람은 부서지고 어떤 사람은 버텨내는가. 차이는 의미였다. 의미가 있는 고통인가. 혹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고통은 질문이고, 우리는 답해야 한다. 성장의 고통, 책임의 무게. 마땅히 겪어내야 할 고통은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피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도망치지 않아야 한다. 그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얻게 된 흉터는 고통을 통과했다는 증표다. 삶이 새긴 자국.


결핍이 결핍된 시대에 우리가 진짜로 결핍한 것은 고통이고, 역경이고, 불편함이며, 날카로움이다. 야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되찾아야 한다. 고통을 통과하는 법을,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법을,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 나아가는 법을. 알을 깨고 나오는 법을. 야성을 회복하고, 내면에 늑대를 기르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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