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에는 '시프그레소'라는 시간이 있다. 겟헤니안들은 한 달에 스무나흘을 성적 정체성 없이 산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채로. 하나의 정체성에 고착되지 않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시프그레소는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의 시간이다.
우리는 이상하게 빠른 시대를 산다. 한 장의 스크린샷으로 한 사람의 전체가 판결되고, 하나의 발언으로 관계가 '손절'된다. 오해는 너무 쉬워졌고, 이해는 점점 더 불필요한 것이 되어간다. 위로 올리면 다음, 왼쪽으로 밀면 삭제. 우리의 손가락은 스와이프에 최적화되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한다.
영화는 같은 시간을 세 번 반복한다. 싱글맘 사오리의 시선, 초등교사 호리의 시선, 그리고 아이 미나토의 시선. 신은 모든 관점을 동시에 본다. 그러나 인간은 순차적으로 경유한다. 우리는 하나씩, 차례로, 더듬거리며 이해한다.
극장 안에서 우리는 안전하다. 세 개의 관점을 동시에 볼 수 있으므로. 극장 밖에서 우리에게는 하나의 시선만 주어진다. 사오리는 호리의 사정을 모르고, 호리는 아이들의 비밀을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스마트폰을 켤 때마다, 하나의 시선만으로 누군가를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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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현상학은 하나의 명제로 시작한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이를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 부른다. 우리는 대상 그 자체를 보지 않는다. 의식 속에 나타난 대상을 본다. 후설은 이를 '노에마(noema, 의식내용)'와 '노에시스(noesis, 의식작용)'로 구분했다. 노에마는 보인 것, 노에시스는 보는 방식을 일컫는다.
첫 번째 파트. 사오리는 아들의 이상한 행동을 목격한다.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혼자서 머리를 자르고, "내 뇌는 돼지 뇌랑 바뀌어서 이상해."라고 말한다. 아이는 담임 호리 선생을 지목한다.
사오리의 의식 속에서 호리는 위험한 교사로 나타난다. 이는 노에마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보는 방식—'싱글맘으로서 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불안', '혼자 아들을 키우는 책임감'—이 노에시스다.
나는 사오리와 함께 그녀의 의식 속에 나타난 호리를 응시했다. 화재 현장을 배경으로 선 그의 모습, 교무실에서 사탕을 씹으며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얼굴. 영화는 관객이 이렇게 보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확신이 주는 안도감.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는 안정감.
이 시선은 호리 그 자체가 아니라, 내 의식이 구성한 나의 지향성이었다.
우리는 대상을 바라볼 때, 경험과 믿음, 편견과 불안이 개입하여 대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한다. 특히 온라인 공간은 이 구성을 집단화한다. 지향성의 위험성. 나 하나의 지향성이 아니라, 수천 개의 지향성이 한 사람을 동시에 구성한다. 그렇게 괴물이 만들어진다.
후설은 『이념들 I』에서 철학의 새로운 시작을 제안했다. 에포케(epoché), 판단중지. '자연적 태도'의 괄호치기.
자연적 태도란, 세계가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는 태도다.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 저 사람은 화가 나 있다. 호리는 폭력 교사다. 우리는 이것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후설은 말한다. "이 태도를 일단 ( ) 안에 넣으시오." 세계가 정말 그렇게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잠시 유보하시오. 부정하는 것도,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판단을 잠시 멈추는 것. 그리고 지켜보자. 어떻게 그것이 나의 의식에 나타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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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은 관객에게 에포케를 강제한다.
첫 번째 파트가 끝났을 때, 나는 확신했다. 호리가 괴물이라고. 두 번째 파트가 시작되면서, 영화는 말한다. "당신의 판단을 ( ) 안에 넣으시오."
호리의 시선. 그는 싱글맘 밑에서 자랐고, 학생들을 진심으로 아낀다. 미나토와 부딪친 것은 사고였다. 요리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선생이다. 여자친구와 프러포즈를 고민하는, 지극히 평범한 청년.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잃어간다. 직업도, 연인도, 명예도.
내 첫 번째 판단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오리의 의식에 호리는 정말로 위협적으로 나타났으니까. 다만 전부가 아니었을 뿐. 그저 하나의 지향성이 드러낸 하나의 측면이었을 뿐.
에포케는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내 판단을 괄호 안에 넣는 순간, 나는 다른 가능성을 목격할 수 있다. '호리는 괴물이다'라는 명제를 ( )안에 넣으면, '호리는 (나의 의식에) 괴물로 나타났다'가 된다. 이 미묘한 차이.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의 이동.
이 이동은 겸손을 낳는다. 내가 본 것이 호리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관점에서 구성된 호리임을 자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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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파트. 미나토의 시선.
이제 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호리도 괴물이 아니었고, 미나토도 가해자가 아니었다. 요리도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진짜 폭력은 요리의 아버지에게서 나왔지만, 그조차 영화는 단순히 악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보여줄 뿐이다. 이 사람 역시 어떤 규범('남자다움' 또는 '정상성'이라는 범주)에 사로잡혀 있다고.
에포케를 거친 후에 남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오히려 명료함이었다. 내가 얼마나 쉽게 판단했는지. 내가 얼마나 빨리 누군가를 괴물로 만들었는지.
디지털 공간에는 에포케가 없다. 하나의 영상, 하나의 발언이 즉각적으로 판단을 생산한다. 그 판단은 괄호 안에 갇히지 않는다. 확증편향으로 강화되고, 집단의 분노로 증폭되고,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한다.
우리는 '지금'만을 경험하지 않는다.
멜로디를 떠올려보자. 하나의 음만으로는 멜로디가 아니다. 방금 지나간 음들(과거파지)을 기억하고, 곧 올 음(미래예지)을 예상할 때, 비로소 선율이 된다. 현재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늘 과거와 미래의 지평 안에서 나타난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행동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과거, 맥락, 상황의 지평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호리가 교무실에서 사탕을 먹은 장면. 사오리의 시선에서 그것은 불성실과 조롱으로 보였다. 호리의 지평을 보면, 여자친구가 입에 넣어준 사탕이 떠오른다. '입 좀 닥쳐'라는, 농담 같지만 진심 섞인 충고. 호리는 말하고 싶었으나 침묵을 강요당했다. 사탕은 그 침묵의 기호다.
같은 행동, 다른 지평. 의미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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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현상은 '지평(horizon)' 안에서 나타난다. 내적 지평(대상 자체의 맥락)과 외적 지평(대상을 둘러싼 세계). 지평은 상황이다. 분위기, 타이밍, 관계, 구성원, 심지어 그날의 날씨와 장소까지. 대상은 진공 속에 떠 있지 않다. 늘 어떤 상황 속에, 어떤 관계망 속에, 어떤 분위기 안에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이 의미를 구성한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이 문장은 그 자체로 아무 의미가 없다. 조롱일 수도, 신뢰의 표현일 수도, 무기력의 고백일 수도 있다. 의미는 맥락에서 온다.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말했는가.
미디어와 디지털 공간은 지평을 제거하는 기술이다. 10초 영상, 하나의 스크린샷, 맥락 없는 발언. 생활세계에서 잘려나온 파편들. 우리는 그 고립된 발언만 보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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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가 차에서 뛰어내린 장면. 사오리는 아들이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미나토의 지평에서 그것은 무엇이었나? "평범한 가정을 꾸리기만 하면 돼." 엄마가 던진 이 말이, 미나토에게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들렸다. 나는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는 차에서 뛰어내린다. 사오리에게는 돌발 행동으로 느껴졌지만, 미나토에게는 절망의 표현이었다.
같은 사건, 다른 지평.
『괴물』이 세 번 반복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영화는 지평을 복원한다. 사오리의 지평, 호리의 지평, 미나토의 지평. 각각의 지평 안에서, 같은 사건은 다르게 의미화된다. 순차적으로 세 개의 지평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은 스스로 깨닫는다. 아, 내가 본 것은 하나의 지평이었구나. 전체가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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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타자였다. 어떻게 나는 타자를 경험하는가?
후설의 답: 유비적 통각(analogical apperception). 나는 타자의 신체를 목격한다. 나는 내 신체가 내 의식의 표현임을 안다. 마치 내가 고통스러울 때 얼굴을 찡그리듯, 타자의 찡그린 얼굴도 고통을 표현하고 있으리라 추론한다. 이것을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 부른다.
타자는 나의 의식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의 의식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다. 타자는 나에게 완전히 투명하지 않다. 나는 타자를 결코 '안에서' 경험할 수 없다. 늘 '밖에서', '옆에서' 경험한다. 타자는 나의 이해로 환원되지 않는다. 타자의 내면을 직접 경험할 수 없지만, 타자 역시 나처럼 의식을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괴물』에서 고레에다의 카메라는 바로 이 상호주관성을 구현한다. 카메라는 절대 인물의 눈이 되지 않는다. POV 숏이 거의 없다. 늘 약간 옆에, 약간 뒤에 선다. 완전한 동일화도, 완전한 타자화도 아닌, 거리를 유지하는 것.
사오리와 완전히 동일화하면, 나는 호리를 괴물로 만든다. 반대로 사오리를 완전히 타자화하면? "싱글맘이라 예민하지", "피해의식이 있어" 같은 규정. 이것 역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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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후기 사상은 '생활세계(Lebenswelt)'로 향한다. 생활세계란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의미로 가득한, 맥락 속의 세계다. 나무는 단순히 '목질섬유로 구성된 생물'이 아니라, 여름이면 그늘을 주고, 가을이면 단풍이 드는, 어린 시절 아래서 놀던 구체적 나무다.
맥락이 곧 의미다.
『괴물』은 생활세계의 회복이다. 첫 번째 파트는 생활세계의 한 단면만 보여준다. 사오리의 생활세계. 그 안에서 호리는 위협이다. 두 번째 파트는 다른 생활세계를 보여준다. 호리의 생활세계. 그 안에서 미나토는 문제다. 세 번째 파트는 또 다른 생활세계, 아이들의 생활세계.
하나의 생활세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타자의 생활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타자를 그의 생활세계 안에서 보는 것. 그의 맥락, 그의 지평, 그의 상황 속에서.
나는 종종 사람을 미워한다.
최선을 다했다고 믿지만 언제나 오해가 쌓이고, 그로인해 상처를 받고(정확히는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고), 외면받으며, 그를 '나쁜 사람'으로 규정한다. 의식 안에서 타인은 이기적이고, 냉담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나는 피해자, 그는 가해자. 이런 구도가 구축되면 타자의 모든 행동은 악의로 보인다. 그가 연락하지 않은 것은 무관심의 표현이고, 짧게 답한 것은 냉대의 신호로 읽힌다. 주관적 세계는 이렇게 구성된다.
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연락을 끊고, 공통 모임을 피하고, 인스타그램을 언팔로우 한다. 디지털 시대의 단절은 이렇게 간단하다. 클릭 몇 번이면 한 사람이 내 세계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리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왜 그렇게 쉽게 그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왜 그의 상황을 궁금해하지 않았는가? 오래 생각해보면 답은 명확했다. 그것이 더 쉬웠으니까.
피해자의 위치는 편안하다. 내가 옳고 상대가 틀렸다고 확신할 수 있으니까. 복잡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니까. 관계를 정리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이 편안함의 대가는 무엇이었나? 한 사람을 괴물로 만든 것. 그의 고통을 보지 못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노에시스를 의식하지 못한 것. 노에시스의 전환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오래된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피해자의식으로 그를 보고 있다.' 이 자각만으로도 무언가 달라진다. 판단과 판단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 틈에서, 다른 가능성이 스며든다.
물론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적어도 이제 나는 안다. 그를 괴물로 만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나의 노에시스였다는 것을.
상대방의 가장 아픈 곳을 목격하고도 등을 돌리지 않는 것. 그 상처를 통해 비치는 상대의 영혼을 온전히 긍정하는 것. 미나토와 요리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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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꽃말을 외운다.
サクラソウ(앵초), 첫사랑. ホタルブクロ(초롱꽃), 고결. ヤマブキ(황매화), 숭고. オダマキ(매발톱꽃), 어리석음과 결의. オドリコソウ(광대나물), 숨겨진 사랑.
그리고 마지막. クサノオウ(애기똥풀). 나를 찾아줘.
아버지가 붙인 이름도, 친구들이 부르는 별명도 아닌. 명명 이전의 나. 규정되기 이전의 존재. 괴물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고, 그냥 요리. 요리는 하나의 이름(괴물)으로 불리길 거부하고, 여러 꽃들의 이름을 외운다.
후설적으로 말하자면, 요리는 단일한 노에마로 고착되길 거부한다. 사람은 여러 방식으로 지향될 수 있다. 첫사랑으로도, 고결로도, 숨겨진 사랑으로도.
미나토는 그것을 허락한다. 요리를 괴물이 아닌, 나무늘보로, 따뜻한 콜라를 좋아하는 친구로, 꽃을 아는 아이로 본다. 타자를 단일한 범주로 환원하지 않는 것. 타자가 여러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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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폭풍우를 통과한 후, 요리는 말한다.
"우리 다시 태어난 걸까?"
"아니, 이전하고 똑같은 것 같은데."
"정말이야?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대로도.
그렇다면 무엇이 변했는가?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 요리의 아버지는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고, 학교의 구조는 여전할 것이다. 변한 것은 단 하나. 요리에게 미나토가 생겼다는 것. 나를 괴물로 보지 않는 사람. 나를 규범으로 재단하지 않는 사람. 나의 생활세계를 인정하는 사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자의 생활세계를 인정하는 것. 맥락 없이 판단하지 않는 것. 파편만 보고 전체를 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 서로의 부서진 조각들을 맞추어가는 그 고통스러운 정직함 속에서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증명받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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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두 아이는 햇빛 속으로 뛰어간다. 어른들은 그 해방감에 동참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이 거리가 적당한 것인지. 내가 누군가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어쩌면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확신하지 못하는 편이 겸손에 가깝다.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폭력을 줄이는 방법이며, 맥락을 묻는 것이 관계를 살리는 길이다.
후설이 말한 "사태 그 자체로"는 결국 이것이었다. 타자를 나의 범주로 환원하지 않고, 타자의 생활세계 안에서, 타자의 맥락 속에서, 타자가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
クサノオウ(애기똥풀). 나를 찾아줘.
요리의 외침은 우리 모두의 외침이다. 명명되기 전의 나를. 괴물이 되기 전의, 범주에 갇히기 전의, 그 사람을.
내가 본 것은 그 사람 자체인가, 아니면 나의 의식 속에 나타난 그 사람인가? 내 노에시스는 무엇이었나? 내가 놓친 맥락은 무엇인가? 답은 없다.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그리고 그 질문을 견디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타자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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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프그레소다. 판단을 유보하는 시간. 괄호를 닫지 않는 용기.
그 시간 안에서, 나는 조금씩 배운다. 보는 것과 판단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타자를 만난다는 것이 타자를 안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조금쯤 비켜 서서, 완전히 이해하려 하지 않고, 완전히 타자화하지도 않고. 그 사람이 나타나는 방식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며. 약간의 거리에서. 맥락을 묻는 자세로.
에포케의 윤리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