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자들을 위한 변론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늘 같은 주제가 나온다. 「꺼삐딴 리」— 기회주의자에 대한 풍자. 「미스터 방」— 변절과 탐욕에 대한 비판. 나는 칠판 앞에 서서 강조한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험에 나올 답을 암기한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면, 나는 묻는다. 정말 그럴까.
나는 양심과 도덕의 가치를 믿는다. 인간은 떳떳해야 하고, 신념을 지켜야 하며, 옳은 길을 가야 한다. 그러면서도 건강한 탐욕 또한 긍정한다. 사회적 지위 상승을 향한 욕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먹고사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은 위선인가. 아니면 교육이 학생들에게 삶의 투박한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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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심판해왔다. 꺼삐딴 리의 이인국은 변절자로, 미스터 방의 방삼복은 기회주의자로 단죄되었다. 하지만 나는 묻는다. 그들이 정말 비난받아야 할 인간들인가. 아니면 그저 우리가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존의 진실을 체현한 자들인가.
나는 이 찝찝함에서 출발한다.
이인국은 의사였다. 방삼복은 통역가였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사상가이자 외교관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최대한 활용해 시대를 통과했다. 비열함인가. 아니다. 명민함이다. 그들은 세상이 변할 때마다 자신도 함께 변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인국은 가난한 시절을 지독하게 견뎌낸 사람이었다. 그는 의술로 성공했고, 그 성공을 지키기 위해 시대의 물살을 읽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 고관들을 치료했고, 해방 후에는 소련군 장교들의 주치의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친일파, 친소파, 친미파로 변신한 변절자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권력자들의 병을 돌봤을 뿐이다.
그의 냉정함은 도덕의 부재가 아니라 생존의 정확성이었다. 그는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챘고, 권력의 맥박을 짚었다. 의사라는 직업은 그에게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시대를 진단하는 눈이었다. 그는 세상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그 병을 치료하는 대신, 병든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택했다.
남들이 뭐라 떠들든 그는 개의치 않았다. 비난은 배부른 자들의 언어였고, 누구보다 생존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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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삼복은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교양도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언어라는 자본이 있었다. 일제 때는 일본어로, 해방 후에는 영어로, 그는 시대의 말을 했다. 통역이란 단순히 말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여권이다. 방삼복은 그 여권을 손에 쥐고 당당히 국경을 넘었다.
사람들은 그를 천박하다 비웃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영어는 유창하지 않았고, 그의 태도는 비굴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현실을 정확히 읽는 사람이었다. 누가 세상의 중심인지 파악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사용했다. 그는 언어라는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었을 뿐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첨처럼 들렸다면, 말하는 자의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아첨과 생존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방삼복은 그 경계를 넘나들며 살았다. 세상의 비웃음 따위, 그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이렇게 썼다. "밥은 하늘이다." 방삼복은 그 하늘을 우러러보지 않았다. 그는 그 하늘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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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시대의 맥박을 짚었고, 통역가는 시대의 말을 빌렸다. 그리고 외교관은 시대의 흐름을 읽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원래 친영파였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 그는 영국 왕실에 충성하는 식민지인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영국은 더 이상 식민지의 편이 아니었고, 프랑스는 새로운 동맹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친불파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 미국 독립의 아버지 중 한 명이 되었다.
변절자인가. 세 번이나 입장을 바꾼 그를 신념 없는 기회주의자라 비난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가 바꾼 것은 신념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판단이었다. 변하지 않는 신념보다 변화하는 현실이 더 진실에 가깝다. 프랭클린은 그것을 알았다. 그는 스스로 "진리보다 유용함을 택했다"고 말했고, 그 선택 덕분에 한 나라가 탄생했다.
그의 변신은 배신이 아니라 시대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는 세상이 원하는 언어를 말했고, 그 언어로 역사를 썼다. 역사가 뭐라 판단하든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옳음을 묻지 않았다. 가능함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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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것을 숭배해왔다.
이인국과 방삼복과 벤자민 프랭클린은 도덕적으로 결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살아남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윤리가 아닐까. 먹고사는 일에 충실한 사람은 세상이 뭐라 하든 자기 삶에 정직한 사람이다.
도덕은 배부른 자의 언어다. 배고픈 자에게는 생존이 곧 윤리다. 그들은 세상을 이용한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을 견뎌낸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들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들만큼 배고프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만큼 절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판단은 거리를 만들지만, 이해는 거리를 지운다. 그렇게 생성된 이해는 용서보다 강하다.
세상은 기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기회를 잡으라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위기는 곧 기회라고,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서점 자기계발 코너는 기회를 설파하는 책들로 넘쳐난다. 강연장에서는 기회를 잡은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는 실제로 기회를 잡은 사람들을 미워한다. 뱀이라 욕하고, 기회주의자라 조롱한다. 그들이 기회를 잡았다는 이유로. 그들이 그 기회를 누렸다는 이유로.
이건 질투인가. 아니면 위선인가.
우리는 추상적인 기회는 사랑하지만, 구체적인 기회를 획득한 인간은 증오한다. 기회를 말할 때는 아름답지만, 기회를 잡을 때는 추하다고 믿는다. 마치 성공은 찬양하되 성공한 자는 경멸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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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일은 집착이 아니라 존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생명은 살 수 있는 방향으로 흐른다. 기회는 물이 흐를 수 있는 틈이다. 그 틈으로 흐르는 자연스러움을 비난할 수 있을까.
묻고 싶다. 당신이 이인국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