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5 heaven
8시 45분.
나는 매일 이 시간에 기상한다.
죽음을 경유해 삶과 만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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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은 내게 일종의 문턱이다.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의 틈새, 꿈의 잔향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순간, 의식이 깨어나면서도 세상의 소음은 아직 본격화되지 않은, 꿈과 현실, 무의식과 의식, 잠과 깨어남 사이, 그 미묘한 경계선. 바로 이 순간에 죽음은 가장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밤새 베개맡을 지키고 있었던 것처럼. 내게 8시 45분은 매일 그 문턱을 연습해보는 시간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삶의 종료가 아니라 시간의 무게를 느낀다. 존재의 밀도를 체감하는 것. 하이데거는 죽음을 "존재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라고 불렀지만, 나에게 죽음은 오히려 가능성 자체를 열어주는 열쇠같다. 죽음이 있기에 선택에 무게가 생기고, 순간에 밀도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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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열쇠는 이미 우리 손에서 멀어져 있다. 자본주의는 죽음을 외주화한다. 태어남도 죽음도 이제 병원이라는 무균실에서 일어난다. 호스피스는 전문 서비스가 되었고, 장례는 포장된 절차가 되었으며, 애도는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되었다. 우리는 죽음을 직접 만날 기회를 잃었다. 마치 사랑을 직접 경험하는 대신 연애 시뮬레이션만 관람하는 것처럼.
종종 장례식장 근처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집값이 싸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죽음의 기척을 일상에서 감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이 이웃이 되었을 때 삶은 어떤 색깔을 띄게 될까. 아마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선명하고 투명한 색깔을 띄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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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매일 밤 우리는 의식을 잃는다. 꿈도 기억도 없는 깊은 잠 속에서 우리는 일종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매일 아침 다시 태어난다. 잠은 작은 죽음이고, 깨어남은 작은 부활이다. 세포들은 끊임없이 죽고 새로 태어나며, 우리 몸은 실시간으로 갱신된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죽음과의 공존이다.
그렇다면 태어남이란 무엇인가. 사물들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다. 연필은 쓰기 위해, 의자는 앉기 위해, 우산은 비를 막기 위해. 그러나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 태어나는가.
키르케고르는 자유의 절벽 끝에 서 있었다. 뛰어내릴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그 순간의 현기증. 그는 이를 '불안'이라 불렀지만, 그 불안은 절망이 아니라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다. 가능성의 바다 앞에 선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어찌할 수 없는 떨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나서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던져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던지는 존재. 깨어남과 함께 찾아오는 그 근본적인 자유의 무게. 8시 45분마다 나는 이 역설을 새롭게 체험한다.
그럼에도 나는 궁금하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여기 있는 것일까.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이 상상하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에게도 각자의 '불꽃'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감수성이 필요할 것이다. 죽음을 사유할 수 있는 그런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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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 어느 겨울 오후, 나는 죽어보고 싶었다. 우울해서가 아니라 궁금해서였다. 혀의 맛이 궁금해 키스를 해보고 싶었다는 친구의 말처럼, 죽음 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어차피 혀도 죽음도 나라는 존재 자체에 내재된 것임에도. 그날 오후 햇살은 유독 차가웠고, 나는 창가에 서서 한참을 그 차가운 빛을 바라보았다. 죽음은 과연 어떤 빛깔일까.
늘 죽음을 동경했다. 정확히는 죽음 이후를. '티벳 사자의 서'의 저승 세계처럼, 죽음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49일의 재판을 거쳐 윤회하는 영혼들, 각자의 업을 심판받는 그 장엄한 과정. 나는 그 이야기를 환상이 아니라 일종의 우화로 읽었다. 죽음 이후가 아니라 죽음 이전을 비추는 거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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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죽음에 대한 궁금증은 결국 삶에 대한 궁금증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존재하는 모든 지식, 모든 지혜, 모든 비밀을. 블랙홀처럼 모든 정보를 흡수하고 싶다. 이런 갈망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의 다른 얼굴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알면 죽음도 두렵지 않을 거라는 착각.
그러나 모든 것을 완전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와 타자는 언제나 나의 이해를 넘어선다. 죽음도 아마 그런 타자일 것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그 경계에서 우리는 타자와 만난다.
시간은 유한하고 궁금한 것은 무한하다. 이 간극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알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런 선택들이 한 인간을 직조한다. 그리고 그 삶의 끝에는 어떤 모양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베케트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듯, 그저 계속 기다린다. 기다림 그 자체가 존재의 양식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을 더 정확하게 사랑하는 방법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진할수록 삶의 빛은 더욱 선명해진다. 죽음을 통해 삶에 도달하는, 그 기묘한 지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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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유성호, 이호 같은 법의학자들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든다. 시신을 통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복원하는 사람들. 그들은 죽음을 해부하고, 분석하고, 증언한다. 침묵하는 시신에게서 말을 끌어내는 능력. 그러나 나는 그들처럼 죽음을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다. 부검대 위의 진실을 밝혀낼 능력도, 법의학적 지식도 없다. 다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죽음 곁에 머물고 싶다. 죽음을 분석하는 대신 죽음을 돌보는 일. 마지막 가는 길을 정성스럽게 배웅하는 일.
그래서 요즘 장례지도사 자격증을 알아보고 있다. 반려동물장례지도사 자격증도 함께. 법의학자들처럼 죽음의 원인을 밝힐 수는 없지만, 죽음의 과정을 돌볼 수는 있을 것이다. 죽음을 사유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을 돌보는 일을 배우고 싶다. 타인의 죽음을, 혹은 작은 생명의 죽음을 정성스럽게 전송하는 법을.
이것은 직업적 관심이라기보다는, 죽음의 사유를 몸으로 옮기는 작업에 가깝다. 죽음이 외주화된 시대에, 죽음을 다시 우리의 손으로 가져오는 일. 장례는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를 위한 의식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 의식을 제대로 치르는 법을 배우고 싶다. '신과 함께'의 저승차사들이 망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인도하듯, 나는 작은 규모로나마 그 문턱을 함께 건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죽음 곁에서, 죽음과 함께.
시간은 흐르고 질문은 계속된다. 매일 아침이 되면 나는 다시 죽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또 하루를 시작한다. 경건하게, 또한 구체적으로. 질문 속에서, 질문을 넘어서.
역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