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는 야외 마당에서 장어 파티를 하는 부유하고 화기애애한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때 장어라는 소재는 우연이 아니다. 장어 엑기스는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고 병충해 저항력을 높이는 천연 영양제다. 아미노산과 미네랄로 무장된 장어는 노동자를 더욱 효율적인 생산 도구로 활용하기 위한 일종의 투자다. 하지만 이 투자는 곧 회수된다. 유만수의 실업과 함께.
'유만수'라는 이름에는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모든 노동자의 운명이 압축되어 있다. '유지·보수만 수십 번'. 끊임없이 고쳐지고, 관리되고, 교체되는 부품.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지 못한 채, 임시방편의 수리만 반복되는 기계.
실업은 단순한 경제적 손실이 아니라 사회적 죽음이다. 가장으로서의 무능, 남성으로서의 몰락, 인간으로서의 가치 상실. 유만수가 느끼는 부양의 무게는 단순한 경제적 부담이 아니라 존재론적 압박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아버지도 남편도 아니다. 그저 공간을 차지하는 무용한 물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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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보통,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메타포가 있다. 아리 애스터 감독의 「유전」에서 주인공은 미니어처 제작자다. 그리고 주인공이 손수 만든 미니어처 작품들이 영화 전반에 걸쳐 재현된다. 즉, 주인공은 의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 운명을 예비한다. 유만수의 아내는 장난처럼 "당신 식물인간이잖아"라고 말한다. 인간 = 나무.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분재로 사육되거나 벌목당할 나무로 규정된다.
나무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선별되고, 잘리고, 운반되고, 벗겨지고, 손질당해 네모난 규격으로 상품화된다. 원목에서 각재로, 각재에서 합판으로, 합판에서 종이로, 종이에서 폐지로. 자본주의는 생명을 단계별로 해체하여 교환가치로 환원시키는 거대한 가공 공장이다. 유만수의 취미인 분재는 「유전」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운명을 예고하는 동시에, 스스로 그 가공 과정을 내면화한 자기기만의 의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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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유만수라는 이름은 현대인 모두의 이름이 된다. 우리는 모두 수십 번 유지 보수되며, 수십 번 거듭나라는 강요를 받고, 수십 번 실패하며 살아간다. 완전한 변화는 불가능하고, 임시방편의 수리만 반복된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조금씩 마모되고, 조금씩 부식되며, 결국 교체 불가능한 폐품이 되어간다.
이에 더해 카메라는 계속해서 불길한 예감을 품는다. 커다란 기계들이 화면을 압도하며 인물들의 머리 위에 위치하는 앵글이 반복된다. 마치 거인이 인간들을 짓밟기 직전의 순간처럼, 아찔하되 무감각한 잔혹함이 화면을 지배한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가 아니라, 자본주의 속 인간의 존재론적 위치를 포착한 은유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전문가로 만들면서 동시에 무력한 존재로 만든다. 분업과 전문화가 심화되면서 개인은 자신의 영역에서는 고도의 숙련도를 갖지만, 그 영역을 벗어나면 완전한 무지 상태에 빠진다. 수채화 전공자는 물리학을 모르고, 물리학 전공자는 분석철학을 모르며, 분석철학 전공자는 아동심리를 모른다. 아동심리 전문가는 수채화와는 무관한 존재가 된다.
이는 음모론이 아니라 냉혹한 팩트다. 아담 스미스가 핀 공장의 분업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논했지만, 그 분업은 결국 노동자를 핀의 머리만 만드는 존재, 핀의 몸통만 만드는 존재로 분할했다. 현대 사회는 이런 분할을 지적 영역까지 확장시켰다.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한 채, 각자는 자신의 좁은 전문 분야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제지맨들이 다른 선택지를 잃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종이를 다루는 기술에 특화된 순간, 다른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소외된다. 전문성이 깊어질수록 전환 가능성은 줄어든다. 숙련된 제지공이 갑자기 요리사나 뮤지션이 될 수는 없다. 20년, 30년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오히려 족쇄가 된다.
이런 전문화는 '발전'과 '진보'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각자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면 사회 전체의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논리. 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을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는 언제든 다른 전문가로 대체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다른 분야로 이동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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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수의 비극도 여기에 있다. 제지업이라는 특정 산업에 모든 것을 건 순간, 그 산업의 쇠락은 곧 자신의 존재 기반의 붕괴를 의미한다. 전문가로서의 정체성과 생존 기반이 일치하는 사회에서, 산업의 변화는 개인에게 실존적 위기가 된다.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무용해진 전문성은 사회적 죽음과 동일하다.
결국 전문화된 사회는 상호 의존적이면서도 상호 무관심한 사회다. 모든 사람이 누군가에게 의존하지만, 아무도 전체를 책임지지 않는다. 각자는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만 유능하고, 그 밖에서는 무력한 소비자가 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개인은 끊임없이 불안하다. 자신의 전문성이 언제 무용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문가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탈출하려면 기존의 모든 투자를 포기해야 하고, 새로운 분야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나이와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전문가들은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평생을 보낸다. 자유로워지려다가 더 깊은 예속에 빠지는 것, 전문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역설이다.
실업 이후 생겨난 치통은 계속해서 유만수를 괴롭힌다. 치통은 의미 없는 고통의 전형이다. 사랑의 아픔이나 성장의 고통, 심지어 계급투쟁의 고통과도 다르다. 아무런 가치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존재를 서서히 침식하는, 순수한 소모의 고통.
일상을 지배하는 미세한 좌절들은 주체를 해체시킨다. 너무 작아서 사회 문제로 인식되지 않지만, 너무 지속적이어서 개인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고통. 치통은 바로 이런 미세좌절의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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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고통에는 더 참혹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해결책이 존재한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 아내의 시선이 머무는 그곳에, 젊고 능력 있는 치과의사가 있다.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가진 자의 선의조차 굴욕으로 받아들이는 빈곤의 역학.
계급 사회의 가장 미묘한 폭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으로 향할 때, 남겨진 자는 자신의 무능을 온몸으로 느낀다. 치통은 그렇게 단순한 질병을 넘어 관계의 균열, 계급의 격차, 자존감의 몰락을 아우르는 총체적 은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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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담배는 이런 미세좌절에 대응하는 자기파괴의 상징이다. 나무에게 가장 해로운 이 물질들을 통해, 유만수는 스스로를 서서히 고사시킨다. 체제의 폭력을 내면화하여 스스로에게 가하는 것.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한 후에도 가족 부양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구조다. 생존 자체가 자기파괴를 요구하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 주체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며 하루를 버텨낸다.
유만수는 할 말이 있을 때마다 손바닥에 빨간펜으로 메모를 적는다. 식물인간이기에 스스로를 종이로 활용하는 이 행위에는 현대인의 소통 불안이 응축되어 있다. 손바닥이라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 새겨지는 빨간 글씨는 피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상처의 기록이다.
나무에서 종이로 변환되는 과정처럼, 인간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기 본질을 깎아내며 생존의 언어를 새긴다. 유만수의 빨간펜 메모는 소통을 위한 필사적 노력이자, 동시에 자기 존재의 증명이다. 이는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후 소통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는 것과 대비된다.
그러나 유만수의 손바닥 메모는 아날로그적 저항이면서 동시에 패배의 선언이다. 인간성의 외주화. 자신의 뇌를 믿지 못해 손바닥에 의존하는 것.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상실' 시대에, 유만수는 자신의 손바닥에 아우라를 새기려 한다.
하지만 손바닥에 쓰인 글씨는 지워진다. 땀과 시간에 의해, 일상의 마찰에 의해. 영구적이지 않은 기록, 그것은 유만수 자신의 존재와 닮아있다. 임시직의 삶처럼,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존재의 불안. 중요한 말일수록 더 꼼꼼히 적어두지만, 결국 사라질 운명에 불과하다.
딸아이의 첼로 연주는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자본의 작동 방식을 여실히 구현한다. 첼로라는 악기는 상당한 경제적 투자를 전제로 한다. 악기 구입비, 레슨비, 연습 공간까지—문화적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물질적 토대가 필수적이다. '예술적 감성'이라는 낭만적 신화 뒤에는 냉혹한 계급 재생산의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더욱 잔인한 것은 경제적 뒷받침이 없을 때 아이의 목소리는 단지 메아리나 소음일 뿐이라는 점이다. 대비는 극명하다. 재취업 전에는 아이의 모든 발화가 단순한 잡음으로 취급되지만, 유만수의 재취업 이후 비로소 첼로가 연주된다.
아이는 변하지 않았다. 재능도, 감성도 동일하다. 변한 것은 오직 그것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조건과 가족의 믿음뿐이다. 경제적 유용성을 상실한 순간, 인간의 모든 표현은 의미를 잃는다.
이는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후 아무리 말하려 해도 가족들에게는 잡음으로만 들리는 상황과 대응된다. 소통의 불가능성이 육체적 변형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 무용성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동일한 구조적 폭력을 드러낸다.
리트리버 두 마리의 이름, '리투'와 '시투'. 이 이름에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리턴(return)'과 '시팅(sitting)'—돌아옴과 머무름. 혹은 '리브(live)'와 '시(see)'—삶과 지켜봄.
하지만 이름의 정확한 의미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움직임이다. 실업과 동시에 떠나고, 재취업과 함께 돌아오는 패턴. 여기에는 현대 가족의 잔혹한 현실이 압축되어 있다.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포기되는 것들은 사치가 아닌 위안과 사랑이다.
그리고 이들은 재취업과 함께 (경제적 안정을 되찾자마자) 곧바로 돌아온다. 이 모습은 현대인의 정서적 안정은 경제적 능력에 종속된다는 씁쓸한 현실을 드러낸다. 리투와 시투의 일시적 부재는 잔혹한 사랑의 경제학을 보여준다.
분재는 이 작품에서 가장 확실한 메타포다. 자연스럽게 뻗어나가야 할 나무가 철사와 가위로 인위적으로 조형되듯, 인간도 사회적 규율을 통해 '유용한' 형태로 가공된다. 학교, 직장, 병원, 감옥 등 훈육 기관들은 주체를 '정상적'인 형태로 조형한다.
유만수가 타인을 분재로 만드는 행위는 기계문명이 나무를 자르고 나르고 벗겨서 상품화하는 과정의 내면화다. 나무였던 자신이 종이가 되기까지 겪은 모든 절단과 압축, 표백과 가공의 과정을 타인에게 가하는 것.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무고한 희생양이 아니라 체제의 공모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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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점은 분재의 '미학적' 차원이다. 분재는 추하지 않다. 오히려 아름답다. 조화롭고 균형잡혀 있으며, 완성도 높은 예술품의 지위를 획득한다. 자본주의 폭력의 가장 고등한 지점. 폭력을 미학화하고, 착취를 예술로 승화시키며, 억압을 문화로 정당화하는 것. 파시즘의 미학화가 미시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방식.
특히 두 번째 살인(엄밀히는 첫 살인) 후 시체를 매장하는 장면에서 이런 논리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유만수는 먼저 애플 아이폰 수십 개를 땅에 묻고, 사각형으로 조립한 인간의 사체를 함께 묻은 후, 그 자리에 사과나무를 심는다. 이 의식은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 구조를 압축한다.
아이폰(기술) - 인간(사체) - 사과나무(자연). 이 순환에서 모든 것은 상호 교환가능한 기호로 전락한다. 아이폰은 사과나무에서 착안했고, 인간은 아이폰을 만들기 위해 소모되며, 사과나무는 인간을 양분으로 자라난다. 소비-착취-재생산의 무한 순환 구조 속에서, 아이폰과 인간은 동일하게 취급된다. 노동자는 기계와 구별되지 않는 교환가능한 부품이 된다.
이 매장 의식은 '창조적' 성격을 띈다. 유만수는 단순히 시체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기반으로 변환시킨다. 죽음을 생산의 원료로 활용하는 것. 이는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심지어 죽음까지도—생산성의 논리 안으로 포섭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네크로폴리틱스(죽음의 정치학)의 구체적 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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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분재는 현대인의 존재 조건을 드러낸다. 효율성과 표준화의 논리는 인간의 몸을 재단하고 재조립한다. 점차 인간은 기하학적 도형으로 환원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분재이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분재로 만드는 존재다. 가지치기를 당하면서 동시에 가지치기를 하고, 조형당하면서 동시에 조형한다. 이런 이중성 속에서 주체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파편화된다.
인간이 나무에서 종이로 전락했다면, 다른 인간들을 살해하는 유만수는 스스로 고목을 갉아먹는 벌레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전화(轉化)의 형태.
구범모의 아내는 구범모에게 "벌레는 당신이지"라는 대사를 던진다. 카프카의 그레고르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했다면, 현대의 벌레들은 서서히, 그리고 자발적으로 벌레가 된다. 생존을 위해 타인을 갉아먹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동료를 해치며, 결국 자신도 누군가에게 갉아먹힐 존재가 되는 것.
유만수의 살인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존재론적 전환이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나무에서 벌레로의 변신. 하지만 이 변신은 해방이 아니라 더 깊은 종속을 의미한다. 벌레가 된 순간, 그는 자신이 파괴하려던 바로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이런 변신은 '어쩔 수가 없는' 선택으로 포장된다. 살기 위해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 모든 합리화 뒤에는 체제가 개인을 벌레로 만드는 구조적 폭력이 숨어 있다. 유만수는 자신을 괴롭힌 시스템과 싸우는 대신, 그 시스템이 만들어낸 또 다른 희생자들을 공격한다. 벌레는 그렇게 다른 벌레를 잡아먹으며 기생한다.
유만수는 마지막 살인을 행하기 전, 오랫동안 참아왔던 폭음을 하며 앓던 이를 스스로 발치한다.
앞서 언급했듯, 유만수는 치통에 시달렸다. 고통을 내재화하고, 그것과 공존하며, 결국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고통을 다루는 전형적 방식. 해결할 수 없으니 참고, 참을 수 없으니 체념하고, 체념할 수 없으니 망각하려 한다.
하지만 스스로 이를 뽑는 행위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폭력적이고 원시적이지만, 직접적이고 확실한 방법. 의료진의 도움도, 마취제의 완충도 없이, 오직 자신의 의지와 고통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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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치는 자기 몸의 일부를 포기하는 행위다. 완전성에 대한 포기, 원형에 대한 체념. 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썩은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전체를 살리려는 시도.
특히 이 발치는 마지막 살인 직전에 일어난다. 자기 자신에게 가한 폭력이 타인에게 가할 폭력의 예행연습이 된다. 스스로를 해체할 용기를 얻은 자만이 타인을 해체할 수 있다. 자기파괴와 타인파괴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발치된 이빨은 한때 유만수의 일부였지만 이제는 이물질이다. 버려야 할 것, 제거해야 할 것. 마찬가지로 그가 살해할 사람들도 한때는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었지만, 이제는 제거해야 할 이물질이 된다. 발치의 논리는 살인의 논리로 확장된다.
결국 발치는 유만수의 마지막 변신을 알리는 신호다. 고통을 참던 수동적 피해자에서 고통을 제거하는 능동적 주체로. 사회의 치료를 기다리던 환자에서 스스로 치료하는 의사로. 그리고 마침내 타인을 치료(제거)하는 외과의사로.
발치된 이빨처럼, 그가 제거할 사람들도 이제 그에게는 단순한 이물질일 뿐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보통 부자와 빈자 간의 계급 갈등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핵심은 빈자와 빈자 간의 밥그릇 빼앗기 싸움이다. 박 사장 가족은 관찰자로 남지만, 근세와 기택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눈다. 지배층은 안전한 거리에서 피지배층의 내전을 구경한다.
『어쩔수가없다』 역시 동일한 구조를 보인다. 유만수가 살해하는 것은 상류층이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다. 같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며, 같은 불안과 같은 절망을 품고 사는 이웃들.
자본주의는 진정한 적을 은폐한 채, 피해자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긴다. 상위 1%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고, 나머지 99%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며 싸운다. 마치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처럼, 관중들의 환호 속에서 서로 죽이고 죽는다. 승자에게는 다음 경기에 나갈 자격이, 패자에게는 죽음이 주어진다. 하지만 어떤 결과든 관중의 지위는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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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기반이 되어야 할 공통의 고통은 오히려 분열의 원인이 된다. 똑같이 굶주리기 때문에 서로의 음식을 탐하고, 똑같이 추위에 떨기 때문에 서로의 담요를 뺏는다. 미시적 폭력들이 일상화되고,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착취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유만수의 살인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체제가 생산해내는 구조적 폭력의 현현. 아도르노가 말한 '부정적 변증법'의 구체적 형태. 모순은 해결되지 못하고, 타인에게 전가된다. 체제를 공격할 수 없으니, 체제 속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타인을 공격한다.
폭력은 자주 정당화된다.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선택과 집중'이라는 논리로, '효율성'이라는 가치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밀어내야 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실패를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신념이 자연스러워진다. 유만수의 손에 총을 쥐어준 것은 바로 이런 시대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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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여전히 인간적 감정을 품고 있듯이, 살인자가 된 유만수도 여전히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분열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주체의 본질적 특징이다. 선량한 개인이 악한 행위를 저지르게 만드는 시스템의 폭력성. 그리고 그 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전가시켜 시스템은 면죄부를 받는 구조.
결국 빈자들의 전쟁에서 진정한 승자는 전쟁을 부추긴 자들이다. 그들은 결코 전장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모든 전리품을 차지한다. 패배자들은 서로를 원망하며 죽어가고, 승자라고 믿었던 자들도 결국 다음 전쟁의 소모품이 된다.
절망적 순환 구조 속에서 박찬욱은 햇빛과 그늘의 변증법을 통해 미세한 희망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초반 면접 장면, 유만수는 면접관 뒤 커다란 창에서 비추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 앞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여기서 햇빛은 심판의 빛으로 작동한다. 자본의 시선, 평가의 시선, 눈부신 폭력성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고 면접관이 묻는다. "단점이 뭔가요?"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라는, 가장 굴욕적인 질문. 유만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한다. "싫은데요." 이 순간, 잠깐 그늘이 주어지며 눈부심이 사라진다. '싫다'고 말하는 순간, 햇빛은 잠시 멈춘다.
하지만 그는 곧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덧붙인다. "라고 하지 못하는 성격이 단점입니다." 그 순간 다시 눈부신 햇빛이 그의 얼굴을 강타한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는 영원히 햇빛에 노출된 채 심판받는다. 완전히 나체로 노출된 상태에서, 자신을 보호할 유일한 방법은 '싫다'고 말할 자유다. 하지만 유만수는 그 자유를 스스로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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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종반부, 마지막 살인을 저지르기 전 아내와의 통화 장면에서 이 대사가 그대로 반복된다. "이런 말 하기 싫은데, 싫어." 이 짧은 문장에는 유만수의 자유가 담겨 있다.
그는 9년 동안 끊었던 술을 마시고, 앓던 이를 스스로 뽑아내고, 평생 소원이었던 불멍을 한다. 이 모든 행위는 자기파괴처럼 보이는 자기 해방의 아이러니다. 그동안 몸에 해로운 것들을 끝없이 참아냈던 유만수는 이제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할 자유를 획득한다.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 자유인의 정의. 면접장에서 햇빛을 피할 수 없었던 그가, 이제는 스스로 그늘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심판의 햇빛 앞에서 비굴하게 웃지 않고, 당당히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부품이 아닌 주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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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영화 마지막, 눈부셔하는 유만수 앞에 아들이 서서 햇빛을 가려준다. 아들은 그늘로 작용한다. 심판하는 햇빛을 차단하는 보호막이자, 동시에 성장을 위한 쉼터. 이는 가족애의 발현이자, 자본주의적 경쟁 논리에 맞서는 돌봄의 윤리.
결국 햇빛과 그늘의 변증법은 완전한 해방의 불가능성과 부분적 구원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시스템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시스템 안에서도 서로를 보호할 수는 있다는 것. 경쟁의 논리를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지만, 그 논리에 완전히 굴복하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 아들의 그늘은 그런 가능성의 상징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만수 스스로 획득한 자유다. 타인이 만들어준 그늘이 아니라, 스스로 '싫다'고 말함으로써 만들어낸 그늘. 이 자기 결정의 순간에, 비록 그것이 파괴적인 선택으로 귀결되더라도, 유만수는 처음으로 온전한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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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것. 이 단순한 행위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가장 어려운 혁명이다. 우리는 모두 면접장의 유만수처럼,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성격을 단점으로 고백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진정한 해방은 그 자유를 되찾는 순간에 시작된다. 비록 그 자유가 우리를 파멸로 이끌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는 현대인의 가장 빈번한 변명이자 동시에 가장 정확한 진단이다. 이 제목은 유만수의 모든 선택을 관통하는 논리이면서, 동시에 그 논리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실업도 어쩔 수가 없고, 치통도 어쩔 수가 없으며, 가족의 냉대도 어쩔 수가 없다. 개들을 보내는 것도, 아내의 시선이 다른 남자에게 향하는 것도 모두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마침내 살인도 어쩔 수가 없는 선택이 된다. 이 문장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만능 키워드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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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는 유만수만의 언어가 아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이 문장을 반복한다. 이는 개인적 무력감의 표출이 아니라 구조적 절망의 공통 언어다. 자본주의 체제가 모든 개인에게 내재화시킨 체념의 문법.
자본주의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장 근본적인 세뇌. 실제로는 선택의 여지를 박탈하면서도 마치 개인이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포장하는 것. 구조적 모순을 개인적 무능으로 전가하고, 시스템의 실패를 개인의 운명으로 체념하게 만드는 것. '어쩔 수가 없다'는 이런 전가와 체념의 언어다. 현대 사회의 많은 폭력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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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어쩔 수가 없다'는 현대인의 주체성 포기를 상징한다.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책임지는 대신, 상황의 논리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것. 그렇게 개인은 역사의 주체에서 환경의 산물로, 행위자에서 피해자로, 결국 인간에서 사물로 전락한다.
재취업이라는 일시적 해결책도 진정한 탈출구가 될 수 없다. 고용은 끝나기 마련이고 부품은 결국 필연적으로 교체된다. 그럼 그 이후엔?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통제 불가능의 영역. 단순한 연장일 뿐, 시한부는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직장은 곧 새로운 해고의 전단계이며, 새로운 안정은 곧 새로운 불안의 예고편이다. 현대인은 '어쩔 수가 없다'며 폭풍에 몸을 맡긴다. 저항할 의지도, 대안을 모색할 상상력도 포기한 채 그저 떠밀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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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나무에서 종이로, 인간에서 벌레로 변해가며 동일한 굴레를 반복한다. 분재가 되고, 상품이 되고, 다시 분재를 만드는 가해자가 되는 순환. 이 과정에서 진정한 해방의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그늘이라는 미세한 희망조차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과연 이 굴레에서 벗어난 완전한 독립이 가능할까? 체제의 논리를 거부할 완전한 자유가 존재할까? 아니면 우리는 영원히 '어쩔 수가 없다'는 체념 속에서 서로를 해치며 살아갈 것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