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이방인
돈을 생각한다. 1924년 경성의 김첨지가 "빌어먹을 돈"(현진건, 「운수 좋은 날」)이라고 욕하며 동시에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에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뻐했던 그 순간과, 2024년 서울의 이센스가 "공짜가 없지, 여기도 여지없이 가격이 붙네"(「Cold world」)라고 노래하는 순간 사이에는 백 년이 흐른다. 하지만 김첨지의 "원수 같은 돈"과 이센스의 "돈이 돈 그 다음의 것들을 주네"(「Cold world」) 사이에는 기이한 동일성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돈이 단순한 교환매체가 아님을 정확히 알고 있다. 김첨지에게는 "아픈 어미 곁에서 배고파 보채는 개똥이에게 죽을 사줄 수" 있는 아버지로서의 자격이었고, 이센스에게는 "주인이 아니면 액수는 의미 없어"(「Cold world」)라는 주체성의 조건이다. 돈은 언제나 돈 이상이었다.
"내가 일을 하는 이유? 일하는 게 싫어서지, 그 이유"(「Cold world」). 이 역설에는 현대인이 자본주의와 맺는 현기증적 관계의 본질을 담겨 있다. 사랑도 미움도 아닌 애증이라는 복합적 감정 구조. 대부분의 현대인은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 일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 취급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일할 뿐이다. "생존이 1순위야 오로지 내 유일한 의무는 밥벌이"(「Bucky」)라는 선언 앞에서 모든 거창한 이상들은 종이처럼 구겨진다.
김첨지가 "재수가 옴 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상황에서 "거의 비는 듯한 눈결을 보내던" 그 절망적 간절함과 이센스의 "확실한 건 난 조급해 아직"(「Mtla」)이라는 고백 사이에는 시간과 돈의 교환비에 대한 동일한 불안이 흐른다. 돈이란 우리가 팔아버린 시간의 응축체다. 그래서 소중하고 동시에 잔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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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전을 손에 쥔 김첨지의 마음은 푼푼하였다"라고 묘사되는 순간과 이센스가 "간소한 짐 든든한 돈"(「Mtla」)을 꿈꾸는 마음 사이에는 같은 욕망이 있다. 소유를 통한 자유의 확보. 그러나 "돈 좀 모이면 뜰라고 여기 못하는 게 왜 이렇게 많아 완전히 숨통이 콱 막히는 기분"(「Bucky」)이라는 답답함에서 소유와 자유의 역설을 목격한다. 자유를 위해 돈을 모으지만,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자유를 잃는 아이러니. 미래의 선택권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의 선택권을 포기하는 현실.
현대의 빈곤은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 "돌아볼 시간이 없어 앞에 보이는 게 많아서"(「Clock」). 경제적 빈곤과는 다른, 시간의 빈곤. 모든 시간이 이미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할당되어 있다. 성찰할 여유, 돌아볼 틈, 멈춰 설 권리까지도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의 새로운 박탈감.
"인생의 무게와 돈의 맛, 관계의 피곤함, 부담감"(「Clock」). 현대적 삶이 개인에게 가하는 복합적 압력의 실체. "서로 먼 데 앉아 쳐다보기만 한 세상과 나"(「Clock」). 지나친 연결과 과잉된 관심 속에서 거리감이 생겨나고, 모든 관계가 비용과 편익으로 환원된다. 또한 관계를 맺는 조건 자체가 변했다. "가난한 자의 신음, 환상 갖다 파는 티비들"(「알아야겠어」)이 조작하는 욕망의 체계 속에서, 우리는 정말 원하는 것과 원한다고 생각하도록 조작당하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구분해야 하는 피로를 겪는다. "비우고 살지 못해 이 끝에 뭐가 있나 보고 와야겠어"(「알아야겠어」)라는 절실함은 이런 피로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진정성에 대한 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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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뭐가 재밌어? 몰라, 돈이나 더 모아 놓는 거지"(「Dance」). 재미보다 현실적 필요의 절박함을 인정할 것. "가난한 시인보다 졸부의 싸가지가 더 괜찮아 보이네 며칠을 굶은 놈의 식사에서 테이블 매너는 번거로운 일"(「Clock」). 냉정한 관찰을 통해 가난을 낭만화하는 허위의식을 거부할 것.
"감사하는 마음을 조금 더 가지래 넌 충분히 얻은 거라고, 과한 욕심은 널 괴롭게 만들 거라며. 대답할 말이 없네 위해주는 말인 건 알겠지만, 근데 너도 말이 없네. 너도 네가 진심인지 모르겠지 아마"(「Mtla」). 위선과 가식을 꿰뚫는 비판적 냉소. 허울 좋은 그럴듯한 말들은 현실주의자에게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공짜는 아무것도 없어 이 기분조차도"(「Bad idea」). 모든 감정에도 값이 매겨진다. "간지니 뭐니 다 액수만 채우게 싹 갈아껴, Because I love myself"(「Bad idea」). 철저한 실용주의적 접근. 인정할 건 인정하고, 수용할 건 수용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조건 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김첨지가 "아따 이놈아, 사십 전이 그리 끔찍하냐. 오늘 내가 돈을 막 벌었어" 라고 떠들던 그 솔직한 기쁨과 이센스의 "Mind on my money, money on my mind"(「Clock」)라는 순환 구조 사이에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 정직함이 있다. 위선의 거부. "Because I love myself 이 말 진짜 좋아 존나 돈같애"(「Bad idea」). 돈이 좋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 일하기 싫다고 털어놓는 것, 관계가 피곤하다고 고백하는 것의 윤리적 가치. 그 당당함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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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도피의 끝에 새 땅은 없지 늪이야 난 깊숙히 내 기둥을 꽂을 준비하지"(「Cold world」). 진정한 성숙이란, 완전한 탈출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창조하는 전략적 현실주의다. "여행 계획을 짜네 서울보다 하늘이 파란 곳이면 다 좋아"(「Mtla」)라는 갈망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내가 살기에 여긴 불편해"(「Cold world」)라는 시스템적 불편 또한 정당하다.
"괜히 가격이나 봤던 first class 차 한대 값을 티켓에다 거리낌 없이 쓰는 인생의 맛은 어떨지 생각해보네, Yeah 돈이란 거 참 편해"(「Mtla」).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퍼스트클래스 좌석이 아니라 거리낌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돈으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들, 다른 말로 돈 없어도 가질 수 있는 것들, 다 얻어 다 얻어내"(「All good thing」). "세상 우습게 보는 거 하고 안 쪼는 거 하고는 다른 뜻"(「All good thing」). 냉소는 절망이 아니라 거리두기다. 시스템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기 위한 자기 보호 장치이면서,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내 수저가 이런 날카로움의 원인, 내 깡의 근원은 내 엄마의 헌신, 벌어 그래 절대 안 무너질 건물이 영혼보다 단단해 훨씬"(「Cold world」). 이런 태도가 현대적 개인이 자본주의와 맺는 가장 성숙한 관계에 가깝다.
"어제와 내일은 없는 거지 아무 의미. 패배와 승리, 아래 위, 다 무의미 I'm just looking for my peace"(「Dance」).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미래를 팔려고 한다. 더 나은 내일, 더 안전한 노후, 더 성공적인 인생. 그러나 미래는 언제나 미래로만 존재한다.
"완전하게 내 살갗에 와닿은 느낌"(「Dance」)에 집중하는 것. 추상적인 미래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구체적인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것. "편히 마음먹어 안 급해, 난 운이 좋은 듯해. 어릴 땐 딱 지금처럼 살고 싶었는데"(「Dance」)라는 회고에는 성취에 대한 만족과 동시에 그 성취가 생각만큼 달콤하지 않다는 깨달음이 공존한다.
운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감사할 줄 아는 것. "Purpose, goal, 이미 해본 것들이 아닌 거라면 그것들이 뭐 어떤 거든"(「Dance」). 목적과 목표마저 소비해버린 세대의 피로를 드러내면서도, "다 그냥 될 거 같은데?"(「Dance」)라는 여유로운 체념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평정심을 발견하는 태도. "어차피 다 혼자야 결국엔"(「Dance」)이라는 고립감을 인정하면서도, 그 고립 속에서 자신만의 평화를 찾는 것. 평화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갖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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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사는 데 사랑이 전부라고 말해, 진심으로 그게 진심이길 바래"(「All good thing」)라는 냉소에는,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냉정한 현실주의가 담겨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차가운 성숙함.
"알아야겠어 그 기분"(「알아야겠어」). 그가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존재의 무게에 대한 정확한 감각이다. "손에 쥐어 봐야겠어, 몰라도 된다는 게 뭔지 알아야겠어"(「알아야겠어」). 무지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도 먼저 알아야 한다는 현대적 딜레마. 현대인이 짊어진 지적 노동의 실체.
나는 이센스의 노래에서 김첨지의 후예를 본다. 백 년 전 김첨지가 "하늘이 캄캄하다"고 느꼈던 그 막막함과 지금 우리가 "하늘이 파란 곳"을 꿈꾸는 간절함은 뿌리가 같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실존적 무력감. 그리고 그 무력감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삶에 대한 의지.
"비우고 살지 못해 이 끝에 뭐가 있나 보고 와야겠어"(「알아야겠어」)라는 절실함은 이런 피로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진정성에 대한 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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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라면 하고 싶지 않아 떠올리기만 해도 지겨운 느낌 왜 그런 거에서 배워야 하나 굳이"(「Mtla」). 과거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후회가 아니라 성장의 증거다. "그런 인생의 고통이 뭔진 모르지만 적어도 모자란 걸로 슬프진 않겠지 나는 그 기분이 뭔지 알아 그걸 벗어난 기쁨이 뭔지 알아"(「Mtla」). 결핍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충만함의 지혜를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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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 김첨지가 "원수 같은 돈" 이라고 욕하면서도 그 돈 때문에 울고 웃었던 것처럼, 여전히 우리는 돈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본주의를 살아내는 것은 투항도 승리도 아니다. 그것은 매일매일 새로운 협상을 벌이며 자신만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창조적 과정이다. 현기증적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 복합적 애증. 이것이 백 년을 관통하는 피곤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개인의 존재론적 특권이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내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