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새벽 5시, 라부부 인형을 사기 위해 다투기까지 하며 밤을 새운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며 나는 처절한 무언가를 발견한다. 간절함이 아니라 공허함. 중국 완구 기업 팝마트의 캐릭터, 토끼 귀에 9개의 뾰족한 이빨을 가진 그 몽환적인 존재를 향한 열망 속에서 나는 현대인의 실존적 빈곤을 목도한다. 목마름. 자기 존재에 대한, 정체성과 의미에 대한 갈증.
얼마 전,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며 느꼈던 그 미묘한 만족감의 정체를 기억한다. 4500원에 구매한 것은 커피가 아니라 '여유로운 사람'이라는 정체성이었다. 카페 안에서 맥북을 펼치고 앉아있는 내 모습. 내가 누군가가 되었다는, 아니 누군가인 척할 수 있다는 안도감.
섬뜩한 진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예언한 디스토피아는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소마를 복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그 소마의 형태가 알약에서 토끼 인형으로, 쇼핑백으로, 텀블러로, 무한스크롤로 바뀌었을 뿐이다. 레니나가 소마 한 알로 하루를 마감했다면, 현대인은 스마트폰을 응시한다. 소마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이 소마인지 모르게 만드는 능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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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더 이상 자연발생적이지 않다. 그것은 치밀하게 설계되고 전략적으로 배포된다. 현대의 '알파 플러스'들은 마케팅 부서에 앉아 우리의 불안을 정밀한 지도로 그린다. 그들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안다. 빅데이터라는 망원경으로 우리 내면의 균열을 들여다보고, 그 정확한 지점에 상품을 배치한다.
정가 12만8000원인 라부부가 크림에서 130만원을 넘어서고, 중국 경매에서는 131cm 라부부 한정판이 2억원에 낙찰되는 현실. 단순한 시장경제의 논리일까? 아니다. 이것은 정체성 시장에서 벌어지는 투기다.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정체성을 구매한다. 놀랍도록 저렴하다. 자아를 판매하는 값치고는.
내 책장을 바라보며 수치스러움을 느낀다. 이 책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실제로 읽히지 않은 채 '독서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존재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천 개의 고원』,『코스모스』,『일방통행로』... 이 책들은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증거물들이었다. 진짜 내가 아닌, 내가 꿈꾸는 '나'의.
시스템은 잔혹하다. 우리를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상품으로 만든다. SNS에서 자신을 상품화하며 좋아요라는 허상의 화폐에 중독된다. 시장에서 팔리는 자아와 실제 자아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우리는 스스로를 브랜딩하느라 스스로를 잃어버린다. 가장 교묘한 지점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게 만든다는 점이다.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조작. 불안한 현대인은 더 소비함으로써 선택했다는 착각을 유지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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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또한 식민지화된다. 넷플릭스 자동재생은 사유할 틈을 주지 않는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다음 영상을 미리 준비해둔다. 킬링 타임, 문자 그대로 시간을 살해한다. 현대인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도록, 침묵을 불안해하도록 훈련받는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끝없는 복제와 소비의 연쇄뿐이다.
감정은 대량생산된다. 드라마로 사랑을 소비하고, 인스타그램에서 타인의 행복을 구매한다. 완벽하게 연출된 삶들 앞에서 우리는 결핍을 느끼고,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다시 소비한다. 스탠리 텀블러를 색깔별, 종류별로 수집하는 고등학생이 3000달러가 넘는 비용을 소비한 것은 단순한 수집욕이 아니다. 그것은 '보여주기 문화'가 만들어낸 강박적 소비행동이다.
이 시대의 소마는 이제 쇼핑이고, 시간 소비이며, 감정 소비다. 우리는 물건뿐 아니라 시간과 감정, 심지어 자아를 소비한다. 그리고 그 소비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개인은 스스로 소비하는 것들의 합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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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국경을 넘나든다. 문화는 상품이 되고, 상품은 문화가 된다. 우리는 중국산 인형을 사면서 한국적 정체성을, 미국산 텀블러를 사면서 국제적 감각을 구매한다고 착각한다.
이 욕망의 정치경제학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것의 민주적 외양이다. 99원짜리 이케아 쇼핑백이 명품가방과 동등한 열망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소비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평등은 허상이다. 진짜 평등해진 것은 우리 모두가 소비자로 전락했다는 사실뿐이다.
푸코가 말한 '생명정치'의 극단적 형태. 권력은 이제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발적으로 소비하도록 만든다. 마케터들은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우리가 원하기도 전에 원하게 만들고, 그것을 선택이라고 포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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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탈출은 불가능하다. 소마 없는 삶은 이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도르노가 말한 '부정변증법'처럼, 이 체제를 완전히 부정할 수도, 완전히 긍정할 수도 없다. 다만 그 틈새에서, 균열 속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할 뿐이다. 진품·가품을 구별하려는 욕망 자체가 허망하다. 진품이든 가품이든, 구매하는 것은 결국 환상이다.
진실에 이르는 길은 의심을 통해서 가능하다. 내가 좋아한다고 믿는 것들을,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의심해야 한다. 적어도 그것이 소마라는 것을 알 수는 있다. 조작된 욕망임을 인식할 수 있다. 그 인식 자체가 저항의 첫걸음이다.
그래서 종종 실험을 한다.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외출하기.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강박적 불안감이 엄습한다. FOMO(Fear of Missing Out)라고 부르는 그 현상을, 온몸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점차 다른 감각들이 살아난다. 바람의 촉감, 새소리, 혼자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의 소중함.
중요한 것은 선택할 능력 자체를 지키는 일이다. 때로는 지루함을 견디고, 조용함을 받아들이고, 비어있는 시간을 그냥 두는 것. 즉각적인 자극 없이도 견딜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 고통을 추구하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소마에 맞서는 무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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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가 말했듯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그 자유는 소비의 자유가 아니라 소비하지 않을 자유, 욕망하지 않을 자유, 트렌드를 거부할 자유, 새벽 5시 이마트 앞 줄에 서지 않을 자유를 포함한다. 소비하면서도 소비에 매몰되지 않고, 시스템 안에 있으면서도 시스템과 거리를 두는 존재.
이는 단순한 금욕주의가 아니다. 물질은 인간보다 강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물질이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거부할 수 있는 능력. 소비를 넘어서는 다른 자기표현의 방법들, 다른 자아실현의 경로들을 찾는다. 이를테면 행위, 생산, 창작, 향유, 예술.
소마의 유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호명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는 여전히 내게 달려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내 안의 법정에 선다. 검사는 시스템이고, 변호사는 양심이며, 판사는 나 자신이다. 무엇을 소비할지, 무엇을 거부할지. 무엇을 욕망할지, 무엇을 외면할지. 그 하나하나의 선택들이 모여 소비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나를 만든다. 그 자유 속에서, 나는 비로소 소비자가 아닌 인간으로 살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지켜야 할 마지막 인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