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에 철학서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경쾌한 제목들 앞에서 설렘이 아닌 일종의 현기증을 느낀다. 한때 인간을 가장 깊은 절망과 숭고한 깨달음으로 이끌던 사유들은 이제 지루함을 달래주는 아스피린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물화' 현상의 철학판. 이것은 단순한 대중화가 아니다. 철학자들의 이름은 브랜드가 되었고, 그들의 사상은 라이프스타일 상품으로 전락했다. 니체는 자기계발서의 새로운 얼굴이 되었고, 스토아 철학은 직장인을 위한 멘탈 관리법으로 포장되었다. 쇼펜하우어조차 '힐링 철학'의 범주에 밀어넣어지고 있다. 철학적 사유가 상품의 논리에 완전히 종속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시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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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생각한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인간을 가장 무서운 자유 앞에 세웠던 그 철학자가, 이제는 '자기계발의 멘토'로 포장되어 직장인들의 동기부여를 담당하고 있다. '위버멘쉬' 개념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마인드셋'으로 번역되고, 본질적인 무언가는 사라진다. 니체가 말한 자기극복이란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든 확신과의 처절한 대결이었는데 말이다.
이런 현상에서 시대의 빈곤을 목격한다. 경제적 빈곤이 아니라 사유의 빈곤. 현대 도시인은 모든 것을 즉시 소비 가능한 형태로 전환시키려 한다. 철학마저도 예외가 아니다. 2천 년을 이어온 인류의 근본적 질문들이 '3분 만에 이해하는' 시리즈로 압축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어떤 초조함을 느낀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휴대폰 벨소리로 만드는 것과 같은 폭력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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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를 다시 떠올린다.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진동하는 진자다"라고 했던 그의 통찰은 이제 '워라밸을 위한 철학적 조언'으로 둔갑한다. '의지의 부정'이 있을 곳엔 '내려놓음의 미학'이라는 달콤한 위로가 자리한다. 동양철학과의 만남을 통해 서구 철학의 한계를 돌파하려 했던 그의 치열함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처세술의 언어들이 현학적 포장지를 두르고 앉아 있을 뿐이다.
진정한 철학적 사유란 위로가 아니라 충격이어야 한다. 안일한 일상을 깨뜨리는 힘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친절한 철학서들'은 푹신한 베개에 불과하다. 씁쓸히 묻게 된다. 과연 우리는 철학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철학의 이름을 빌린 위안을 원하는 것일까.
시장은 당연히 후자를 원한다. 출판사들은 철학자의 이름에 '실용적', '일상적', '쉬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상품을 만들어낸다. 마치 철학이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줄 만능 도구라도 되는 것처럼,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존적 갈증을 교묘하게 상품화한다. 복잡한 인생의 문제들이 한 권의 책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진정한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더 깊은 문제들을 드러내 보인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우리에게 확실성을 주는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불확실성으로 이끄는 것처럼, 철학은 안전한 답 대신 위험한 질문들을 선사한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을 때, 그것은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라는 고통스러운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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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시대의 비극이다. 우리는 질문을 견디지 못한다. 불확실성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철학마저도 확신의 언어로 번역하려 한다.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행복한 삶을 위한 철학'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이 '소통의 기술'로 변모하는 순간에서 나는 어떤 상실감을 느낀다. 철학자들의 치열한 고민과 방황은 깔끔하게 정리된 교훈으로 축소된다.
진짜 철학은 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새로운 의문이 생기고, 한 문장 읽을 때마다 기존의 생각이 흔들린다. 그것이 철학의 본래 모습이다. 하지만 '즉석 철학'에 길들여진 독자들은 이런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다. 그저 쉬운 답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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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린 시대, 니체에서 쇼펜하우어로, 다시 비트겐슈타인으로 이어질 철학 유행의 계보를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철학은 패션처럼 소비된다.
소비되지 않는 철학을 희망한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하고,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미궁으로 이끄는 그런 철학.
어쩌면 필요한 것은 철학의 대중화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회복이 아닐까. 속도와 효율을 추구하는 시대에 느림과 깊이의 가치를 되찾는 것. 즉석 해답 대신 오래 품고 가야 할 질문들을 만나는 것.
위로받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그 고독 속에서 피어나는 사유의 꽃. 그것이야말로 어떤 마케팅으로도 상품화될 수 없는, 철학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