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연금술사
프란츠 카프카 800원
가스통 바슐라드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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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MENU」
카페의 메뉴판. 보들레르 800원, 카프카 800원. 바슐라드 1,200원.
시인은 제일 값싼 카프카를 주문한다.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함께.
우리는 모든 것에 값을 매긴다. 보들레르에게도, 카프카에게도, 하버마스에게도.
사유의 깊이가, 문학의 무게가, 사상의 밀도가 400원으로 환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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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절'이란 단어가 최근 몇 년 사이 유행했다.
손해를 보고 있는 주식을 매도함을 뜻하는 주식 용어.
관계는 포트폴리오가 되었다. 내게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이 사람은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고, 나는 무엇을 받을 수 있는가를 저울에 올리고 계산한다. 그리고 판단한다. 손절할 것인가, 보유할 것인가.
효율의 언어가 관계를 점령했다. 시간 대비 만족도. 투입 대비 산출. ROI(투자 대비 수익률). 우리는 관계에도 이 공식을 적용한다. 이 관계는 내게 충분한 수익과 효용을 주는가.
사랑조차 시장화되어 거래의 언어로 번역된다. 에바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에서 현대의 사랑을 분석한다. 우리는 연애 시장에서 자신을 판매한다. 자기 홍보. 이미지 관리. 경쟁력 강화. 나의 시장 가치는 얼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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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과 동등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등가교환.
세계를 거대한 저울로 만드는 법칙.
하지만 어떤 것들은 저울에 올려놓는 순간 본질을 잃는다.
물 35리터. 탄소 20킬로그램. 암모니아 4리터. 석회 1.5킬로그램. 인 800그램. 소금 250그램. 질석 100그램. 유황 80그램. 불소 7.5그램. 철 5그램. 규소 3그램. 인체를 구성하는 레시피.
엘릭과 알폰스 형제는 엄마를 되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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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한 문장으로 세계를 베었다. 사유하는 주체와 사유되는 객체. 정신과 물질. 나와 세계. 잔인할 정도로 깔끔한 절단면.
중세인에게 세계는 살아 숨 쉬는 유기체였다. 돌 하나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었고, 나무는 천사의 숨결로 자랐으며, 별들은 신의 눈동자였다. 세계는 언어였다. 읽어야 할 텍스트였고, 해석해야 할 신비였다.
자연은 책이었다. 신이 쓴 두 번째 성경. 꽃 한 송이에서 신의 섭리를 읽었고, 천둥소리에서 신의 분노를 들었다. 세계는 상징들의 숲이었다. 모든 것은 무엇인가를 가리켰다. 자기 자신 너머를 가리켰다. 장미는 그저 장미가 아니라 성모의 순결이었고, 사자는 그저 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질병은 죄의 징표였다. 열이 나는 것은 단순히 체온이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불타는 것이었다. 의사는 맥박을 짚으며 환자의 영혼과 대화했다. 약초 하나하나가 신의 은총을 담고 있었다. 치료는 기도이자 참회였다. 신과의 화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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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을 증발시켰다. 세계를 측정 가능한 객체로 전락시켰다. 나는 세계와 분리되고, 세계는 마치 시계처럼 취급되게 되었다. 태엽을 감으면 작동하고, 부품을 갈아 끼우면 수리되는.
그렇게 근대 과학이 탄생했다. 뉴턴이 사과의 낙하를 관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사과는 더 이상 원죄의 상징이 아니었다. 사과는 질량을 가진 물체였다. 낙하는 기적이 아니라 중력이었다.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세계에서 그림자가 사라졌다. 상징이 사라졌다. 신비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무게, 부피, 속도—측정 가능한 것들뿐이었다.
의학도 변했다. 베살리우스가 인체를 해부했다. 하비가 혈액 순환을 발견했다. 몸은 더 이상 영혼의 집이 아니었다. 몸은 기계였다. 심장은 펌프였고, 폐는 풀무였고, 위는 가마솥이었다. 기억은 뇌의 신경 패턴으로, 사랑은 옥시토신 분비량으로, 눈빛은 홍채 근육 수축으로 설명되었다.
세계는 말을 멈췄다. 돌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무는 침묵했다. 별들은 그저 불타는 가스 덩어리가 되었다. 세계는 의미를 잃었다. 세계는 사물들의 집합이 되었다. 둘로 나뉜 데카르트의 세계.
우리는 엄청난 것을 얻었다.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고, 세계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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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가 있어야 할 자리엔 정체모를 끔찍한 괴생명체가 있었고, 엘릭은 팔과 다리를, 알은 몸 전체를 잃었다.
능력주의는 등가교환의 다른 이름이다. 능력주의는 말한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실패는 네 책임이고, 성공은 네 업적이라고. 노력한 만큼 돌려받는다고.
하지만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마이클 샌델은 묻는다.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성공은 정말 나만의 것인가. 오직 나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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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는 두 가지 거짓말을 한다.
하나. 승자는 자신의 성공을 온전히 자기 덕분이라고 믿게 된다는 오만.
둘. 패자는 자신의 실패를 온전히 자기 탓이라고 믿게 된다는 치욕.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저울은 출발선을 재지 않는다. 등가교환은 얼핏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을 고정시킨다. 빈익빈 부익부. 등가교환은 답하지 않는다. 등가교환은 현재 상태를 전제로 한다. 과거를 묻지 않고, 역사를 지운다.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건강한 몸으로 태어난 것, 교육열 높은 가정에서 자란 것, 좋은 학군의 학교를 졸업한 것,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것,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은 것. 모두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나의 성공은 전적으로 나의 것이 아니며, 나는 타인과 사회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운의 영향력을 부정한다. 물론 노력은 중요하다. 하지만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저울은 이미 기울어져 있다. 우리는 그 기울어짐을 보지 못한 척한다.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가려 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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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은 "공동선"을 제시한다. 공동선은 나와 너를 연결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등가교환을 넘어선 책임이 있음을 상기한다. 거래가 아닌 나눔. 교환이 아닌 공유.
엘릭 형제가 마침내 깨닫는 것도 이것이다.
마지막 전투 후, 에드워드는 다시 진리 앞에 선다.
알폰스의 육체를 되찾기 위해.
"대가라면 여기 좋은 게 있잖아. 이건 내 진리의 문이야."
진리의 문. 연금술을 쓸 수 있는 능력. 에드워드의 정체성.
진리가 묻는다.
"연금술을 쓸 수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하려고?"
에드워드는 웃는다.
"전락할 게 어딨나? 처음부터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연금술 같은 게 없어도 모두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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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에드워드는 윈리에게 말한다.
"윈리, 등가교환이다! 내 인생의 반을 줄 테니까 네 인생의 반을 나에게 줘!"
연금술사의 언어. 계산의 언어. 저울의 언어.
윈리는 웃으며 대답한다.
"절반이 뭐야? 다 줄 건데."
"다 줄 건데."
이 한 문장이 저울을 박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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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원래 그렇지 않았던가. 사랑은 회계가 아니다. 사랑은 손실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을 체계로 서술하지 않는다. 단편들로 서술한다.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서로 배열된 파편들. 불안(Angoisse), 조우(Rencontre), 신체(Corps), 선물(Cadeaux), 기다림(Attente).
사랑은 체계가 아니다. 사랑은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다. 언어는 일반화한다. 추상화한다. 그물로 잡는다. 하지만 사랑은 그물을 빠져나간다.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모래처럼. 유리병에 담으려 하면 사라지는 안개처럼.
사랑은 지극히 개별적이다. 세계에서 유일하다. 반복 불가능하다. 대체 불가능하다. 지문처럼. 눈송이처럼.
바르트의 말한다.
"사랑하는 자는 취약하다."
사랑은 갑옷을 벗는 것이다. 칼을 내려놓고, 방패를 버리는 것이다. 사랑은 상처받을 가능성이다. 버림받을 가능성이며, 배신당할 가능성이다. 사랑하는 자는 이 모든 가능성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한다. 그럼에도 다가간다.
이것이 사랑의 취약성이다. 동시에 사랑의 힘이다.
약함이 강함이 되는 연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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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는 『불확실한 삶』에서 상호 의존성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의존한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기는 혼자 살 수 없다. 먹여줘야 하고, 안아줘야 하고, 돌봐줘야 한다. 노인도 혼자 살 수 없다. 몸이 약해진다. 기억이 흐려진다. 아픈 사람도, 슬픈 사람도, 외로운 사람도. 우리는 모두 언젠가 누군가에게 의존한다.
하지만 의존은 일방적이지 않다. A가 B에게 의존하고, B는 C에게 의존하고, C는 다시 A에게 의존한다. 한 줄을 당기면 전체가 진동한다. 우리는 거미줄 위에 있지 않다. 우리는 거미줄 그 자체다.
상호 의존성. 이것은 약점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조건이다. 존재의 구조.
현대 사회는 의존을 부정한다. 자율적이어야 한다고,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자기완결적이어야 한다고 압박한다. 마치 섬처럼. 아무도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고,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고.
'자수성가' 라는 단어가 찬사인 사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가 신화가 되는 사회.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그 누구도 혼자 일어서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의 어깨를 딛고 일어선다. 항상.
의존을 부정하는 것은 폭력의 씨앗이다. 의존을 부정하면, 타자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필요하지 않다면, 타자를 존중할 이유가 없다. 그런 세상에서 타자는 방해물이 되고, 제거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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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는 관계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총합. 그 관계가 나를 나로 만든다.
사랑은 선물이다. 되돌려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선물. 되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는 선물.
사랑 안에서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의 구분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기에.
사랑은 경계를 흐린다. 국경을 지우고 담을 허물고 선을 넘는다.
사랑은 나를 너로 변형시키고, 너를 우리로 변형시킨다.
고통, 관계, 취약성, 사랑. 그렇게 경계는 확장된다.
사랑의 연금술.
"고통을 동반하지 않은 교훈에는 의미가 없다. 인간은 어떠한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때, 사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강철같은 마음을 갖게 된다."
강철같은 마음.
강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한다. 쇠를 불에 넣는다. 붉게 달아오른다. 노랗게, 파랗게, 하얗게. 1,200도에 다다른다. 망치로 강하게 두드린다. 쇠가 펴지고 얇아진다. 형태가 잡히면 물에 담근다. 수증기가 폭발하고, 온도가 뚝 떨어진다.
다시 불에 넣고 달군다. 다시 두드린다. 다시 냉각한다. 이 과정을 반복한다. 수십 번, 수백 번. 부서지고, 벼려지고, 부서지고, 벼려지고. 마침내 강철이 탄생한다.
강철의 단단함은 결과다. 하지만 강철이 되는 과정은 끝없는 부서짐이다. 한없는 벼려짐.
부서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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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의 대전제.
이해(Comprehension) - 분해(Deconstruction) - 재구성(Reconstruction)
우리는 매일 삶을 이해한다. 사건과 상황을 해석하고 분해한다. 그리고 재구성한다. 완벽함을 분해하고, 취약성으로 재구성한다. 계산을 분해하고, 사랑으로 재구성한다. 나를 분해하고, 우리로 재구성한다. 새로운 나로, 새로운 관계로, 새로운 삶으로.
받기만을 멈추고, 주기 시작하는 것.
계산을 멈추고,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
완벽함을 포기하고, 취약성을 껴안는 것.
저울을 내려놓고, 손을 내미는 것.
그렇게 우리는 모두 연금술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