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그림을 보고 나왔을 뿐인데

by Liar

* 본 이미지는 에곤실레의 자화상을 오마주한 그림입니다.



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걸 정말 좋아했다.

마음이 지치거나,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질 때면

늘 미술관이 가장 조용한 피난처가 되어주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근처 전시회가 곧 끝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저번주 용기내어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목적도, 기대도 없이

그냥 눈이, 마음이, 무언가를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조용한 평일 오후, 미술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의 전시.
익숙한 이름들과 익숙하지 않은 감정들이 조용히 벽에 기대어 있었다.

초입의 그림들은 화려했다.
금빛과 꽃, 곡선과 부드러운 눈동자들.
마치 유혹하듯 다가오는 그림들이었지만, 그안엔 정제된 고요함이 깔려 있었다.

눈이 먼저 머물고, 그다음 마음이 천천히 따라 붙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시선에 오래 머물렀다.
예쁨을 넘은 정적, 그 안에서 나는 오래된 어떤 평화를 마주했다.


그리고 이어진 방.
조금은 조명이 어두워졌고, 그림 속 인물들은 시선을 피하거나
정면으로 내면을 겨누었다.

몸은 비틀려 있었고, 손가락과 관절은 유난히 날카로웠다.
색은 바랬고,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지독할 만큼 진했다.

더 이상 회화 같지 않았다.
감정 하나가 종이 위에 붓 대신 본능으로 새겨진 것 같았다.

그 앞에서 나는 오래 서 있었다.

묘하게 불편한 시선,
떨리는 팔,

비어 있는 듯한 눈동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의 감정들이 그 그림 어딘가에 있었다.

“이런 기분, 나도 알아.”
말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말하지 못했던 어떤 마음이 그림 앞에서 조용히 피어올랐다.

그림은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정직함으로 나를 무장해제시켰고, 그게 오히려 지금의 나에겐 더 깊은 숨처럼 다가왔다.

괜찮지 않았던 순간을 인정하는 일.
그게 꼭 아파야만 가능한 건 아니라는 걸, 그림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던 길, 햇빛이 내 눈을 찔렀다.

익숙한 거리인데 세상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계단 아래로 발을 디딜 때 나는 조용히 깨달았다.

오늘, 나에게 감정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감정이 아직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림을 보고 나왔을 뿐인데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감정이란, 꼭 눈물이나 고백처럼 거창하게 드러나야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아주 조용히, 들리지 않는 호흡처럼 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 앞에 가만히 서서 그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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