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퀄라이저 1, 2, 3
얼마 전 전화번호를 정리했다.
가족, 내가 가르치는 고등학생들 20여 명과 그들의 어머니들, 두 명의 절친, 그리고 가스 검침 오는 아주머니의 번호만 남기고 모두 지웠다. 대학 시절이나 직장 생활을 하던 때는 동호회와 사람들의 번호를 저장하는 것이 참 즐겁고 보람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모든 것이 결국 부질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싫어서도, 무슨 나쁜 일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6개월, 1년쯤 연락이 없다면 서로의 삶이 바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과감히 번호를 지우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무심코 잘 지내세요?“라고 카톡을 보내거나, 한 번쯤 목소리가 궁금해 지인에게 전화하는 일도 더는 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인간관계를 최소화하는 것이 나의 철칙이 되었다.
생활은 심플해졌다.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그들이 추천하는 옷과 음식보다는 내가 직접 선택한 것들을 조용히 즐긴다. 과하지 않게 소식하고, 최대한 집밥을 먹으며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은 멀리하려고 한다. 물론 항상 잘 지켜지진 않지만, 최대한 노력 중이다.
퇴근 후에는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차를 마신다. 주말에는 조용한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이런 습관은 캐나다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부터 생긴 나의 작은 낙이기도 하다.
얼마 전 넷플릭스 추천 목록에서 ‘더 이퀄라이저 2’가 눈에 띄었다. 덴젤 워싱턴의 얼굴과 어두운 배경, 뭔가 촌스러운 영화 포스터를 보면서 예전 홍콩 갱스터 영화를 따라 만든 헐리우드 영화겠거니 생각하며 몇 번을 그냥 넘기다가 결국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이건 단순한 영화가 아니었다. 나에게 삶의 철학처럼 다가왔다.
전직 CIA 요원의 이야기, 범죄 조직을 소탕하는 장면이나 액션 영화의 스릴감보다 더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영화 속 보스턴의 풍경이었다. 찰스 강변의 길, 다운타운의 모습, 공장 느낌이 나는 철도길, 그리고 그 지하철 역 주변의 황량함까지. 화면 속 풍경이 내 코끝에 익숙한 향기를 불러일으켰다. 2005년 겨울, 나는 보스턴에서 어학연수라는 이름으로 첫 해외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의 감정과 기억이 온몸에 선명히 느껴졌다.
나는 도시에 민감하다. 도시계획가였던 내 전직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시의 차도와 인도, 인도를 따라 이어진 건물선과 가로수의 조합은 늘 내게 또렷하게 다가온다. 어느 도시를 가든 그런 식으로 도시를 느낀다.
새벽에 소설책 한 권을 들고 카페로 향하는 주인공 맥콜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했다. 가족과 친구도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잠시나마 나의 기억과 겹쳐졌다. 보스턴에 살던 그 시절부터 나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던 그 도시에서 나는 몇 달을 홀로 보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았던 시간이 영화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맥콜이 살갑게 대하던 콜걸, 공교롭게도 그녀의 이름이 ‘테리’였고, 지금 내가 사용하는 영어 이름도 테리다. 물론 스펠링은 다르지만 같은 발음을 가진 그녀에게 가해지는 불의에 대한 분노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장면에서 문득 과거의 나의 상처와 경험이 희미하게 오버랩되었다. 아직은 그 이야기를 깊이 풀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언젠가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될 것이다.
집을 정갈하게 정리하고 차를 마시며 수프를 끓이는 맥콜의 일상도 기억에 남는다. 영화적인 연출일 수도 있지만, 내가 추구하는 절제와 침묵의 삶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의 정돈된 일상과 고독한 분위기에서 나는 다시 나를 발견했다.
1편에서 맥콜이 일했던 공구상은 캐나다에서 매일 들르던 홈디포나 캐네디언 타이어와 같은 곳이어서 매우 익숙했다. 2편에서 그가 택시 드라이버로 일하는 모습은 내가 캐나다에서 잠시 했던 우버 기사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손님들과의 짧은 에피소드와 그들이 나에게 건넸던 인사도 선명히 기억난다.
영화 속 등장하는 책,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나왔을 때는 혼자 탄성을 지를 정도로 공감이 컸다. 벽화와 그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3편의 시칠리아 배경까지. 올해 들어 지중해 여행을 꿈꾸며 여러 도시 정보를 찾고 있던 나에게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알타몬테는 단번에 나의 도시 리스트에 올라갔다.
더 이퀄라이저 시리즈 덕분에 참 특별하고 의미 있는 주말을 보냈다. 액션 영화에서 나의 삶과 감정을 돌아보는 경험은 조금 기이하면서도 소중한 선물 같았다.
이제 4월이 지나면 새로운 5월이 온다.
내 스스로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