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가두어둔 자유에 관하여
토론토에서 10년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내가 배운 가장 세련된 가치는 '노동하지 않을 권리'였다. 해가 지면 약속이라도 한 듯 상점의 불이 꺼지고, 거리는 일순간 침묵에 잠긴다. 나는 그것이 서양 근대사가 이룩한 위대한 인권의 승리라 믿었다. 저녁 9시만 되면 정막에 휩싸이는 거리를 보며, "인간은 낮에 일하고 밤에는 쉬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를 서구적 합리주의의 정수로 받아들였던 시절이었다.
나 역시 한때는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입에 올리며, 한국의 밤거리를 비인간적인 노동 착취의 현장이라 비판하곤 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 마주한 한국의 밤은 단순히 잠들지 못하는 도시의 피로감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내가 간과했던 또 다른 차원의 '자유'와 '안전'이 흐르고 있었다.
서구 도시들의 밤은 고요하지만, 그 고요는 종종 공포를 동반한다.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퇴근한 거리는, 역설적으로 시민들을 이른 귀가로 내몰고 골목을 누군가의 시선도 닿지 않는 사각지대로 만든다. 공동체의 상호 감시와 보호의 시선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개인은 고립되고 도시는 활력을 잃는다.
내가 토론토에서 누렸던 그 '저녁이 있는 삶'은, 사실 밤 9시 이후의 외출을 포기해야만 유지되는 반쪽짜리 평화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어둠 속에 가두어둔 자유는 진정한 자유라 부르기 어렵다.
반면 한국의 밤은 역동적이다. 새벽 3시에도 무인 라면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외국인의 모습이 경이롭게 비치는 이유는, 그들에게 한국의 밤은 공포로부터 해방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비인간적이라 비판하는 심야 노동과 새벽 배송이, 실상은 우리 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실질적인 등대가 되고 있었다.
끊임없이 달리는 엔진 소리, 편의점의 밝은 조명, 그리고 새벽을 가르는 이들의 발걸음. 이 ‘올빼미’들의 노동이 응집되어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지탱해 온 셈이다. 노동의 형태를 이분법적 도덕의 잣대로 나누기보다, 그 노동이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수행하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먼저 읽어내야 한다. 밤을 잊은 노동은 누군가에게는 고단함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헌신이기도 하다.
심야 노동의 비인간성을 외치는 이들이 정작 우리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학원가와 야간 자율학습에 갇혀 있는 현실에는 기이할 정도로 침묵하는 것을 본다. 성인의 자발적 경제 활동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청소년의 수면권을 박탈하는 입시 노동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진정 인권을 고민한다면 우리가 먼저 멈추어야 할 ‘심야의 악습’은 배송 트럭의 시동 소리가 아니라, 불 꺼지지 않는 학원가의 교실일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국가가 개입해 멈춰 세워야 할 진정한 의미의 인권 탄압이자 아동 학대다. 배송 기사의 밤길은 누군가의 내일을 준비하지만, 아이들의 밤샘 공부는 정작 그들의 오늘을 갉아먹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누리는 상쾌한 아침 배송과 안전한 밤거리 뒤에는 누군가의 뜨거운 밤이 있었다. 나 역시 한때는 근대사 속 노동의 권리만을 추종했으나, 이제는 안다. 도덕적 허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의 밤을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가 하는 실질적인 연대라는 것을.
오늘 밤, 창밖으로 보이는 저 멀리 편의점 불빛을 보며 그 따스함이 누군가의 고단함을 딛고 서 있음을, 그리고 그 덕분에 나의 밤이 이토록 평온함을 다시 한번 복기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