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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jonler Oct 02. 2018

고전 철학서를 읽어보고 싶으세요?

책으로 사유하기-<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 읽기 전 주의사항 *

심약하신 분들은 제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요약한 부분’과, 본문 가운데 ‘인용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 부분은 되도록 스킵하시는 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1. 고전철학서는 인간에 대한 사유의 결정체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에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가 있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입자가속기가 세워져 있는데 이 장치는 깊이가 150미터, 길이가 27킬로미터나 된다. 이 시설을 짓는데 약  5조 5천억 원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이 엄청난 장치가 하는 일은 원자핵, 중성자, 양성자와 같은 입자들을 충돌시켜 더 작은 입자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물은 네 가지 기본 원소 중 하나라고 믿었다. 물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형태의 완전한 물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물이 수소 2개와 산소 1개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물질이라는 것은 현대에서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되었다. 가장 작은 입자로 생각했던 원자도 쿼크라는 더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또한, 이미 상식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많은 노력을 들여 최소 단위의 입자를 찾아내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이 우주를 이루는 근본적인 물질을 찾기 위해서이다. 우주의 근본을 아는 것의 본질은 결국, 인간을 이루고 있는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함이다. 인간의 근본을 알기 위한 노력은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전 인류의 관심사이며, 인류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향유하기 이전부터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사유해 왔고, 그 사유의 결정체가 바로 철학이다.

  

   인간에 대한 사유 가운데 하나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이다.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세계를 분리해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한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세계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그 방대한 서술이 시작되며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에 관한 담론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관한 담론 <니코마코스 윤리학>

<요약>

 인간은 마땅히 좋음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완전한 목적으로서의 최고의 선이 바로 행복이다. 행복한 삶은 탁월성에 따라 행위하는 삶인데 이는 인간 고유의 능력인 이성이 발휘되는 품성 상태이다. 탁월성은 인간의 영혼의 상태들 중에서 칭찬받을 만한 것이며, 탁월성의 가장 고유한 것인 합리적 선택으로 ‘잘 행위함’을 통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합리적 선택은 이성과 사유를 동반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행위할 때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중용인데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중용을 10과 2의 중간인 6처럼 산술적 비례가 아니라 감정적 행위들과 관련하여 관계에서의 중간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돈을 주고받는 일과 관련한 중용은 지나침은 낭비이고 모자람은 인색이다라는 것이다. 중용이 바로 ‘잘함’이며 이러한 중용의 활동이 완전한 행복이며 이 활동은 이성이 결합된 관조적인 것이다.

 즉, 지성을 동반한 탁월한 행위로 최상의 선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은 분명 그 자체로서 선택되는 활동들 중 하나로 놓여야 하며 행복한 삶은 앞서 언급했듯이 탁월성에 따라 사는 관조적인 삶이다. 관조적인 삶은 그 자체로 영예로운 것이므로 관조의 지속성과 행복의 지속성은 비례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관조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5줄 후려치기!>

1. 인간은 마땅히 좋음(선)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그중 최고 선은 행복이다.

2. 행복은 탁월성에 의해 행위하는 삶이다.

3. 탁월성=이성+지성으로 합리적 선택=잘 행위함=중용=관조적 삶

4. 관조적 삶은 그 자체로 영예로운 것으로 관조의 지속성과 행복의 지속성은 비례한다.

5. 많이 관조할수록 행복하니 많이 관조하라.








3. 사람들은 왜 고전철학서를 탐독할까?

그런데 최상의 좋음은 분명 완전한 어떤 것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하나만이 완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겠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이 다른 것 때문에 추구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하며,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는 않는 것이 그 자체로도 선택되고 그것 때문에도 선택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행복이 이렇게 단적으로 완전한 것처럼 보인다. p.27
즉 탁월성의 유는 중용이며, 품성 상태라는 것, 탁월성은 자신이 연원 하는 행위들을 자체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것, 탁월성은 우리에게 달려있으며 자발적인 것으로 올바른 이성이 명령할 방식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을 논의했다. p.99
탁월성은 목적을 결정하도록 하는 반면, 실천적 지혜는 그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들을 행위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천적 지혜가 [철학적] 지혜를 지배하거나 영혼의 더 우월한 부분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의술이 건강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의술은 건강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이 생겨나도록 돌보는 것이니까. 따라서 건강을 위해 명령하는 것이지, 건강에 대해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p.232


  먹고사는 일보다 더 절박한 인생의 의문점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글인 듯 한글 아닌 한글 같은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철학서를, 살면서 들여다볼 일이 있을까 싶다. 나 또한 그랬었으니까.


  고전서적을 읽다 보면, 내가 찾고자 했던 정답과는 거리가 오히려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정답을 찾는 일보다 정답을 찾기 위해 행위하고 있는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체가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지는 것이다. 내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그것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나와 같은 고민을, 이미 수 세기 전에 언어화 해 놓았다는 것이 놀라우면서 이내 안도감 같은 것이 생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은 나의 삶 앞에 놓여있는 물음표를 해결하기 위해 들여다보게 된 고전 철학서 중 하나다. 절박하게 답을 찾아 헤매던 행위가 이어져 닿은 한 지점에서 “지혜를 쫒으며 관조적으로 행위하는 삶이 행복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를 만났을 때 느낀 안도감이란. 그렇게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수 세기 전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방법으로 분명한 위로를 건넸다.








4. 고전철학서를 읽을 때 주의점

 고전으로 분류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당대의 지성인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아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쓴 책이다. -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책을 쓰다니, 역시 지성인의 클라스. 게다가 아들이 빠져나갈 틈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 그의 논리는 완벽하고 촘촘하다. 그러나 몇 가지 주의해서 봐야 할 점들은 있다.


1) 시대상황을 고려한 시각

돌은 본성적으로 아래로 움직이도록 되어있기에 위로 움직이도록 습관을 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만 번을 위로 던져 습관을 들이려 해도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 불을 아래로 움직이게끔 습관을 들일 수도 없는 일이며, 어떤 것도 본성과 다르게 습관을 들일 수 없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당시는 과학기술이라는 것이 없던 시대이기에, 앞서 인용한 물질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지금 관점에서 보면 완벽히 틀린 말이며 퇴색되어버린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글이 쓰였던 시대가 2300년 전이기에 시대상황을 고려한 시각으로 재해석해서 봐야 하는 부분이고, 이는 고전을 읽을 때 반드시 갖춰야 할 시각이다.


2) 지식인의 사유라는 한계

  우리에게 남겨져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고전서적은, 책을 읽고 쓸 수 있었던 계층인 지식인들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대의 다양한 계층의 생각이 아닌, 사유를 통해 관조함으로써 인생의 의미를 찾고 행복을 느끼는 철학가의 사유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그 시대에 살던 농민의 생각은 책으로 만나볼 수 없다. 농민이 자신의 행복함의 조건을 책으로 남길 수 있었다면 <농사의 윤리학>이라는 책이 나왔을 것이고, 그 책이 우리에게 전해졌다면 우리는 현재, 농사를 지으며 행복할 방법을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관조하는 것만으로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을 것 같다.

  독서만이 행복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사유만이 우월하다는 말은, 책 볼 시간이나 에너지가 허용되지 않는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일종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행복은 전적으로 내가 원하는 방법을 통해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관조하는 삶이 나에겐 확실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꼭 읽어 보면 좋을 고전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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