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철학하기
<버닝> 2018
감독:이창동
주연:유아인, 스티븐연, 전종서
1.
“아프리카 부시맨들에게는 두가지 헝거가 있는데 하나는 정말 배가 고픈 리틀 헝거, 또 하나는 삶의 의미에 배가 고픈 그레이트 헝거야”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느라 삶의 의미를 추구하기 힘든 사회속에서, 부유함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상위 몇프로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보통의 사람들은 끊임없는 교육과 자기계발을 통해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간 부를 동반한 성공이라 불리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산다. 그러나 능력을 통해 신분상승을 이루는 것도 한계가 존재하는 현대 사회구조상, 개천에서 용난다는 것도 옛말이 되어 버렸다.
2.
해석의 여지가 있고 영화의 모든 메타포가 해미는 벤에 의해 살해 되었을 것이라는데 맞춰져 있지만 개인적으론 벤이 해미를 살해했을 것이란 종수의 판단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종수는 노력해도 가질 수 없을 만한 부를 지닌 벤은 사는 환경도, 성격도 여유롭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인 해미는 벤을 따르고 그의 부를 즐긴다. 종수는 벤에게 묘한 시기심을 느끼지만 자신에게 친절한 벤에게 적대감을 표출할 만한 명분이 없다.
오비이락. 때마침 해미가 없어지고 종수는 벤의 집에서 우연히 해미의 시계를 발견하고, 벤의 집에 이전에는 없었던 고양이가 있기에 해미가 키우던(고양이가 있다고 믿는게 아니라 고양이가 없다는 사실을 잊은 듯한) 고양이 보일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원하는대로 벤이 해미를 살해했다고 점점 확신해 간다. 그리고 마침내 종수는 벤을 살해하고 벤의 시신을 태워버린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대로 대상을 바라보고 자기 편한대로 해석하는데 익숙한 동물이기에 종수에게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믿는게 진실이 되어 버렸다.
부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동시에 부를 가진이를 향한 묘한 질투심을 느끼는 모순적인 심연의 배경에는 부유함이든 능력이든 지나치게 개인에게만 그 역할을 맡겨버리는 사회 시스템의 책임이 크다. 또한 개인의 노력 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데 그 성과가 좋지 않기라도 한다면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대 패배자쯤으로 평가해 버리는 사회적 분위기도 문제다.
3.
“마임을 잘하려면 여기에 귤이 있다고 믿는게 아니라 귤이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되”
비닐하우스는 제철이 아닌 생명에게 계절을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살게 한다. 그것이 비닐하우스의 본질이다.
해미가 이야기한 마임이 바로 우리 삶의 모습은 아닐까. 없는데 있다고 믿고,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며 비닐하우스라는 구조가 주는 착각에 빠져야 우리가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를 착각에 빠뜨리는 구조가 낡았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 말고 태워버리는 용기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