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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jonler Sep 14. 2018

질문하지  않는 우리 사회

책으로 사유하기

  2010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G20 폐회 기자회견장에서 오바마가 부러 한국의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었다. 세네 차례에 걸쳐 질문이 없는지 확인했으나, 한국인 기자단에서는 손을 드는 기자가 한 명도 없었고, 끝내 중국인 기자에게 발언권이 넘어갔다. 이 굴욕적인 일을 많은 분들이 기억할 것이다. 질문하는 게 직업인 기자가, 질문해야 할 자리에서 질문하지 못한 것도 당연히 문제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를 기자 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만은 없다.




우리는 왜 질문하지 않을까?

1.  우리는 답을 맞히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정답만을 찾아서 답하도록 가르치는 우리 교육 안에서 지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질문의 과정이 소거당하는 것은 일반적인 우리 교실의 풍경이다. 이러한 주입식이고 권위적인 교실 분위기 속에서 당연히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기 힘들다. 이러한 침묵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2.  ‘몰라도 아는 척’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구조적인 부조리함이 침묵의 또다른 원인이다. 궁금한 것을 질문했을 때 “이런 것도 몰라?” 라며 돌아오는 비판적이고 따가운 시선 때문에 우리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질문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야 하는 일이고 이것은 곧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 부담은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자기계발을 하는 것으로 해결하도록 온전히 개인에게 맡겨져 있다.


3. 흔히 쓰이는 말 중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표현이 있다. ‘그저 잘 모를 때는 가만히 있어야 한다' 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 우리 사회에 만연한 중간 지향적인 모습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하여 옳은 길이 아니라 서로 편하고 쉬운 길을 가도록 종용한다. 그렇게 질문을 통해 따져 묻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 부조리함 속에서 끊임없이 학습한다.


4.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한국사회의 모습 속에서 상사나 윗사람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으로 규정된다. 또한 질문을 하는 행위를 굉장히 돌발적인 행동으로 여기며 질문하는 사람을 향해 ‘치기 어리다’ 내지는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등의 비판적 평가를 내린다. 이러한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질문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심한 경우 구성원의 질문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일방적인 정보전달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소통을 단절한 채 설득의 과정을 소거한다. 이러한 집단에서는 소수의 기득권자들이 구성원들의 개별적 주체성을 억압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당연히 사실에 대한 가치판단은 금기시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대통령에게 정기적으로 질문을 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왕이 될 수 있다.”-헬렌 토마스
헬렌 토마스

헬렌 토마스는 존 에프 케네디 전 대통령부터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까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백악관 기자실의 전설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질문하지 않는 우리 사회는 그녀의 경고대로 지난 정권, 대통령이 왕으로 군림했던 사태를 목도하였다.




 문재인 정권에 들어서 고무적인 사건이 있었다. 신고리원전 개발 초기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제안하여 주민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이루어졌던것. 숙의민주주의가 첫 시행된 사건으로 기억된다. 전문가집단을 조직하고 주민들을 불러모아 설득하고 토론했다. 이전 정부들이 주민들의 반대에 아랑곳하지않고, 설득이나 설명의 과정을 생략하고 권위로 밀어부쳤던 것에 비하면 너무도 민주적인 방법이었다.

  몇 개월 전에는 대한민국의 입시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학부모 대표를 선발해 토론의 장을 열기도 하는 등 우리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가 이루어 지고 있다. 그러나 위계적인 분위기에서 주입받는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토론문화는 아직 낯선게 사실이다. 이전에 활발하게 해보지 않았기에, 토론을 통해 서로에게 좋은 방향으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에는 아직 많이 서툴 수 밖에 없는 우리. 어떻게 해야 좋은 방향으로 변모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 세계적으로도 답하는 사회에서 질문하는 사회로 가고 있다. 주어진 해답을 암기하는 산업사회에서 지식과 정보의 창조사회로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해야 한다.


1. 사회적 변화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의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학교 교실 분위기의 개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앞서 우리나라에는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만연해 있다고 언급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퇴계 이황에게서 그 지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퇴계이황 과 기대승

  퇴계선생과 까마득한 그의 제자 기대승 사이에 토론이 벌어졌다. 서신으로 진행된 사단칠정론에 관한 토론이었는데 이 토론은 무려 13년 동안 계속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퇴계가 58세 기대승이 32세 되던 해였다. 그들의 나이 차이는 무려 26살이었다. 거기다 퇴계는 당시 이미 명망 있는 학자로 공조참판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고 기대승은 종 9품의 말단 벼슬아치였기에 감히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또한 스승에게 거침없이 질문하고 스승의 의견에 대하여 논변한다는 것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엄격한 규율의 조선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러나 퇴계는 제자의 질문에 불쾌해하지 않고 하나하나 답변해 준다.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고 존중하는 언어로 성실하게 대화를 해나간다. 학자로서 또는 지식인으로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토론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현재 이 서신들은 조선 철학사의 꽃이라고 평가된다.

  퇴계의 인품은 당대에도 인정받는 훌륭한 인성이었다고 전해진다. 질문하는 행위를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너그럽게 답변해주는 퇴계의 모습을 통해 시대를 관통하여 배울 수 있는 지혜가 있음을 깨닫는다. 퇴계가 그러했듯이, 선생님은 학생의 질문을 반가워해주고 학생은 선생님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해야 한다.

  


  신영복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저서 『담론』에서 그는 자신의 오랜 강의 경험에서 터득한 것을 두 가지로 정리하여 언급한다.

“첫째,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비대칭적이지 않다. 둘째, 학생들에게 설득하거나 주입하려고 하면 안 된다. 그리고 교실은 공감의 장이어야 한다.” -신영복

  가르침으로 깨달음도 주지만 궁금한 점은 스스럼없이 질문할 수 있도록 해 주고 공감하는 토론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 선생님이라고 그는 말한다.


  교실에서 시작한 변화는 나아가 사회적 변화로 귀결될 것이다. 질문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에서 공부하고 사회에 나온 세대의 회사나 직장의 분위기는 당연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도 더 이상 질문하는 행위를 위험하거나 돌발적인 행동으로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



2. 개인적 변화

  개인의 변화도 당연히 수반되어야 한다. 질문이 자유로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질문을 하지 못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질문’이 결론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과정이라면, 변화하는 사회가 요구하는 창조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핵심을 관통하는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무엇을 해야 할까?


①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기

 유시민 작가는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012년의 한 인터뷰에서도 논리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발언이 유튜브에서 컨텐츠로 재생산되어 재조명된 적이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 박근혜의 논리적 말하기와 생각하기의 부족함을 지적한 것이다.

 “박근혜라는 사람이 당선되면 상대편 진영에 대한 보복뿐만 아니라 권력을 휘두를 것이다. 그 이유는 논리나 말로 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힘을 쓰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논리력이나 이치에 밝은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이 사리에 어두운 권력자를 이용하는 조선시대의 환관정치형태가 될 것이다.”

2016년 우리는, 그의 말이 옳았음을 목도하였다.

우리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생각과 말하기를 통해 통찰력을 키워주는 학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②인문학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유태인 학살은 사악한 인간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손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보고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정부의 지침에 따라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학살의 모든 과정이 가치판단에 대한 사유 없이 냉정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통찰력을 키우기 위한 해결방안으로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회복을 제시하였다. 이때의 정치적 존재란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적인 삶의 관심 이외에 공적인 장, 즉 각종 시민단체, 혹은 정당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토론하는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 넓은 차원의 사유를 하며 학습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대량학살에 대한 연구 결과로 『계몽의 변증법』(1944)이라는 저서를 남긴 아도르노 또한 이 사건을 구조적인 틀 안에 갇혀 옳은지 그른지 폭넓게 사유하지 못해 벌어진 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 해결방안의 실마리를 인문학에서 찾았다. 인문학이란 인간의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대안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인문학을 하는 것은 따져 묻고 사유하는 자세를 체득하는 것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둔다.

  나 또한 우리사회에 만연한 부조리 함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 부조리함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보편’이라는 것에 나를 맞추며 살아왔다. 뜻하지 않은 개인적인 사건으로 사회 구조의 부조리함을 온 몸으로 겪어내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의문점에 정답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위해 책을 보기 시작했다. 정답을 찾기 위해 시작한 행위에서 아직까지 정답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 행위의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이 식을 줄을 모른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개개인의 깊은 열망의 반영이 아닐까 싶다. 물론 자기계발에 치우친 것 같은 느낌도 지울 수는 없지만, 개인의 인식 변화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바로 선 개인은, 내앞에 온 질문 기회조차 날려버리는 종속적인 성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자유롭게 질문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나아가 건강한 방식으로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의 삶이 조금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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