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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jonler Dec 02. 2018

멈췄어야 했다, 미안하오 야옹님

로이 냥이랑 꽁냥꽁냥

  로이는 탐스러운 장모에,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큰 눈의 동공확장 필살기를 가진 미묘이다. 동물병원이라도 가는 날은 로이가 너무 이쁘다며 멍냥 집사들 이목을 집중시켜 집사 부심 뿜뿜. 이 인기냥을 만져보고 싶다는 사람이 많은데 그럴 때면 유유자적 팬서비스라도 하는 듯 다른 사람이 쓰다듬을 동안 내 품에 안겨 가만히 있어 준다. 만져본 이들은 어쩜 이리 털이 부드러운 비단 같냐고 한다. 최근 그 비단이 엉켜 뭉치기 시작했다.
  많이 움직이는 앞다리 사이의 가슴털이 곱슬곱슬해지고 심하게 엉켜 매일 빗어줘도 소용이 없었다. 한번 엉키기 시작하니 엉킨 부분을 중심으로 더 심하게 엉켜서 털 덩어리 같은 게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글에서 보니 동물들, 털이 엉키면 괴롭다던데.. 가까운 곳에 고양이 미용을 알아봤다. 강아지 미용이랑 달라서 고양이 미용은 마취 미용이 있고 무마취 미용이 있었다. 마취 미용은 8만 원, 무마취 미용은 10만 원. 뭐여. 내 머리 하는 거보다 비쌈. 역시 고양이는 지갑으로 키우는 게 맞다. 내심 놀랐지만 우리 야옹이를 괴롭게 할 수 없기에 안내되어 있는 아이디로 샵에 카톡을 했다. 일요일인데 응답을 하다니 역시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하며 다음 주 주말로 예약을 문의했다. 주말은 두 주 동안 예약이 꽉 찼다고 했다. 이 겨울에 고양이 미용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3주 뒤 주말, 마취는 아무래도 몸에 해로우니 무마취 미용으로 예약을 했다.

  예약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무릎에 올라와 배 뒤집고 누워있는 로이를 쓰다듬는 내손에 엉킨 털 뭉텅이가 아주 거슬렸다. 한번 눈과 손에 거슬리기 시작하니 신경이 쓰여 참을 수가 없다. 요것만 잘라내 볼까 하는 충동이 들어 나도 모르게 발 털 제거에 쓰는 고양이 전용 가위를 손에 잡았다. 살살 달래 가며 엉킨 부분을 손으로 잡았는데 정도가 심해 한번에 안될 것 같아 조금씩 잘라내 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오? 이 기분 뭐지?

 묘한 쾌감을 느끼며 엉킨 한 부분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앞다리 안 쪽으로 백 원짜리 크기만큼 땜빵이 생겼지만 다른 털에 가려져 티가 안 났다. 왕 뿌듯. 손에 걸리는 게 없어지니 너무 개운했다. 내친김에 반대쪽 다리 안쪽의 엉킨 부분도 손가락으로 잡아 거침없는 가위질로 땜빵 만들기에 성공했다. 몇 번 서걱거리고 나면 뭉친 털 덩어리가 제거되는 그 개운한 느낌은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렇다. 재미라는 게 생겨버렸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가슴털이 곱슬거리는 것이 눈에 거슬리던 참이었기에 가위를 가슴털 쪽으로 가져갔다. (여기서부터 호러)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로이를 무릎에 눕히고 본격적으로 가위질을 해나갔다. 몇 번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리다 포기한 로이는 체념한 듯 힘을 축 풀었다. 그 사이 가위손 에드워드에 빙의된 듯 내 가위질은 거침이 없었다. 잘려 나온 곱슬 털들이 수북이 쌓여갔고 어느덧 앞다리 사이의 가슴털을 모두 제거했다. 세상에 이렇게 시원할 수가.! 이렇게 뭔가에 몰입한 건 실로 오랜만이다. 목과 허리가 뻣뻣해지는 줄도 모르고 집중했다. 허리를 우두둑 펴며 결과물을 스캔했다. 이런, 가슴털이 없으니 얼굴의 털이 옆으로 삐쭉 도드라져 보였다. 어쩐다. 쪼금만 다듬어 주지 뭐. 이미 자신감이 생겨버린 나였다. 

여기서 정말로 멈췄어야만 했다. 

  로이를 다시 무릎에 눕히고 오른쪽 볼에 있는 털을 조금 잡고 가위를 들이댔더니 로이가 화들짝 놀라 심하게 버둥거렸다. 한 번에 해야겠군. 로이를 진정시키고 오른쪽 볼털을 다시 잡고 급한 마음에 세로로 가위를 넣어 한번에 잘랐다. 아뿔싸.
얼굴 한쪽이 아주 곧은 직선이 되었다. 어떡하지.. 망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멈추기엔 너무 많이 와버렸다. 균형은 맞춰야 하니. 반대쪽 얼굴을 잡았다. 서걱. 서걱. 반대쪽 볼 털 까지 자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미묘였던 로이가 한순간 온 세상 못생김을 모조리 얼굴에 장착하고 네모난 레고 얼굴이 되어 있었다. 로이 너... 너 털빨이었어...
한순간에 미모를 잃은 로이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동안 나를 가만히 주시했다. 그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미.... 미안 해 헤헤헤헤하하하어떠ㅋㅋ켘ㅋㅋㅋㅋ 
  한참을 웃고 나서 미안해진 나는 그제야 더 손을 대는 건 안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위를 내려놓고 추르(고양이 마약 간식)로 재빨리 환심을 샀다. 기분이 좋아진 로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골골 송을 부르며 품에 안겨 한참 그루밍을 했다. 오구오구 내 새끼. 

  지금 로이는.. 부풀린 듯 풍성한 몸의 털과, 작은 레고 (심지어 비대칭) 얼굴이 대비되어 무척.... 음.. 아.. 이건 그냥 총체적 난국이다. 어차피 미용할 거 3주만 참으면 됐는데... 재미는 왜 있어가지고... 3주 뒤에 미용사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재밌어서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다고 얘기하면 너무 생각 없어 보이는데... 우리 로이 얼굴이 원래 네모라고 할까. 하아......
  인간은 늘 과욕이 문제다. 적당할 줄을 모름. 그래서 옛 성현들이 그렇게 인내와 중용을 강조했나 보다. 미안하오 야옹님. 인내와 중용의 미덕이 없는 집사를 용서하시오. 


그래도 덕분에 간만에 실존한 느낌이었다, 로이야. (반성안하냐옹!)



묘권보호를 위해 레고머리 실사는 비공개









다음 메인에 노출되어 브런치 인기글에도 등극하고 오늘 15000뷰를 돌파했어요, 관심가져주시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로 레고양이 실사를 공개합니다ㅎ

웃으셔도 됩니다. 로이야 미안해.. 같이 웃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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