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어제 점심때쯤 계속해서 전화가 울렸다. 엄마다. 부모님 전화는 일부러 받지 않고 조용한 시간에 다시 거는 편인데 이렇게 계속 전화하는 건 급한 일이라는 뜻이다.
“아빠한테 돈 보내달라고 카톡 안 했지?”
“어? 내가 왜 돈을 보내라고 해?”
“니 이름으로 아빠 휴대폰에 돈을 보내달라는 카톡이 왔는데 아무래도 보이스 피싱인 것 같아. 아빠는 ‘큰 딸’로 니 번호를 저장해 놨는데 실명으로 연락이 왔고, 상무님 핑계를 대는 게 보이스피싱이다 싶더라고” (나는 회사원이 아니다.)
전화를 끊고 일단 급히 카톡 메시지에 내 이름 도용해서 돈 빌려달라는 톡에 응하지 말라고 안내를 해뒀다. (제 번호 갖고 계신 분들 혹시 연락 오면 절대 응하지 마시길!!) 그 사이 엄마가 아빠 휴대폰의 메시지를 사진 찍어 보냈다. (엄마는 스마트폰 캡처 기능을 아직도 못쓰신다.)
어떻게 아빠한테 내 이름으로?! 문득 며칠 전, 아이디 도용이 의심된다는 네이버 안내가 머리를 스친다. 아마 그때 네이버 주소록에서 번호를 획득한 모양이다. 내가 ‘아부지’로 저장을 해놓아서 신분 확인이 쉬웠을 것이다. 그놈들, 엄마한테도 톡을 보냈는데 엄마는 원래 휴대폰 확인을 잘 안 한다. 엄마에게 반응이 없자 아빠에게 보낸 것 같다.
나는 돈이 급하게 필요한 일이 없을뿐더러 없으면 없는 대로, 안 쓰면 안 썼지 누군가에게 빌리지는 않는다. 특히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효녀라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잔소리 폭탄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다. 힘들어도 부모님 앞에선 늘 괜찮은 척을 하는 편인데 그런 내가 더더욱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대화 내용을 찬찬히 읽어 보는데 봐도 봐도 어이가 없다.
“아빠 바뻐?”
“왜? 이제봤네!~”
“나지금급한일이 하나있어 그러는데..부탁하나만해도대?”
“무슨일인데?”
“어제 상무님이 카드문제생겨갔고 먼저 내카드에 돈을 입금받았단말이야. 오늘 거래처에 입금해줘야하는돈이라는데..인증서 오류땜에 몼보내고 있어...은행에 문의했는데 오후 4시전으로 푸린대 거래처에 빨리 보내줘야 하는데,,,ㅠㅠ 아빠가 먼저 보내주면 안대?”
내가 띄어쓰기는 좀 헷갈리지만 저렇게 못 배운 티 나는 맞춤법을 구사하지는 않는다..(정말?) 수준 하고는. 비웃고 있는 와중에 아빠의 뜻밖의 팩트 폭행 대답을 발견하고 현웃 터졌다.
“아빠 거진데!~”
이건, 진짜다.
대화 내용을 다시 보니 울 아빠... 낚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가.. 보낼 돈이 진짜 없었다는 것. ㅋㅋㅋ
딸한테 주기 싫어서가 아니다. 이건 진짜 진짜다. 엄마가 용돈을 많이 안 주시는 모양이다..
한참을 웃다가 아빠가 안쓰러워진 나는, 엄마 몰래 아빠 통장에 백만 원을 보내드렸다. 보이스피싱에 낚이려야 낚일 수 없었던 아빠의 진짜 이유 때문에, 뜻밖의 연말 보너스를 획득하신 아빠. 입금 문자를 확인 하시자 마자 연락이 왔다. 안 그래도 되는데 왜 그랬냐며... 엄청 좋아하신다 :D 물론 술 좀 사드시고 엄마에게 곧 회수당하실 게 훤하지만, 잠시라도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행복 하구만.
보이스피싱 덕분에 뜻밖의 효녀 된 이야기 끝.
P.S
자나 깨나 보이스피싱 조심!
아부지 팔아서 다음 메인에 등극하고, 12만 조회수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아부지 지못미..
아부지 돈 없는거 이제 12만 명이 알았다고, 미안하다고, 조심스럽게 글 보여드렸더니 즐거워하시네요. 다행.
다음 글도 지인들에게 빨대 꽂아 쪽쪽 빨아서 재밌게 써보겠습니다.
보이스피싱 조심하시고 읽어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조회수가 계속 올라가 어느덧, 25만 분께서 읽어 주셨네요.. 웃을 일 없는 팍팍한 삶에 소소한 웃음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
25만 뷰 돌파 기념 아부지와 대화를 공개합니다 :)
즐거우셨다면 구독 ㄱ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