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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jonler Jan 13. 2019

당신의 죽음

1-1

 학교에서 오전 조교 업무를 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미국에 계신 시아버지였다. 한껏 목소리 톤을 올려 전화를 받았다.


-아버니임~

-조용한 데로 가서 전화 좀 받을 수 있니?

-네? 네~

 심상치 않다.


-Sam이.

-네 출장 갔어요. 어제 제가 자고 있을 때여서 전화는 못 받았는데 아마 도착했을 거예요.   

 일주일 있다가 돌아와요.

-놀라지 말고 들어. 지금 인도네시아 대사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Sam이.

-왜요, 아버님. 무슨 일인데요..?

-Sam이, 목숨을 구하지 못했대...

-네?...

-Sam이 인도네시아 공항에서 칼을 든 강도를 당했다는구나...

-어... 무슨 말씀이신지.......

-피를 많이 흘린 모양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담담하게 들려오는 말에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종아리에 경련이 오더니 급기야 무릎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렸던 건지 귀에서 심장이 뛰는 건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시어머니가 울먹이며 전화를 이어받으셨다.


-우리 Sam 불쌍해서 어떡하니...

-잘 못 아신 거 아니에요?...

-지금 전화를 받고 여러 번 확인했는데 Sam이 맞대. 어떡하니...


 믿기지 않았다. 상황이 파악된 건지 현실로 돌아온 건지 눈물이 터져 나왔다. 괴상한 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나조차 처음 들어보는 내 울음소리였다. 누구를 신경 쓸 최소한의 이성도 남아있지 않았다. 떼어내고 싶을 만큼 저린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손이 잘 펴지지 않았다. 심장에서 얼굴 쪽으로 벌레들이 떼를 지어 올라오는 느낌이 들면서 입술도 오그라들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비상계단에서 나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옆 사무실의 교직원 선생님이었다. 짐승 같은 소리가 너무 오래도록 나기에 와 보셨다고 했다. 내가 쥐고 있던 전화를 대신 받아 상황을 전해 듣게 된 교직원 선생님은 내 상태를 시부모님께 설명드리고 전화를 끊으셨다. 나를 수습해다 앉혀놓고 급히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거셨다. 엄마가 학교에 나를 데리러 왔을 때는 거의 탈진상태였다.

 '거짓말이면 좋겠다, 이 힘든 꿈에서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다, 인도네시아 당국이 신원확인을 잘못한 거라고 번복했으면 좋겠다, 남편의 유해를 한국으로 냉동해서 온다는데, 해동되면 깨어나지 않을까.'


 그 사이 남편의 시신이 한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남편인지 아닌지 즉시 확인하고 싶었는데 볼 수 없다고 했다. 시신의 훼손이 너무 심해서 가족들이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어제까지 살 부비고 살던 남편이 죽었다는 게 내겐 이미 충격인데. 내 남편이라고 항의를 해봐도 소용없었다. 병원 관계자들은 염을 마치고서야 얼굴을 확인시켜주었다.

 남편이었다. 그는 새파래진 얼굴로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아니기를 끝까지 바랐던 기대감마저 무너졌다. 그렇게 주저앉아 다시 울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지만 내가 지켜줄 수 없었던, 너무도 외로웠을 그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피할 겨를도 없이 내 앞에 가로놓인 죽음 앞에서 끊임없이 ‘왜’가 터져 나왔다. 내가 믿던 신이 증오스러웠다. 내 아픔을 이해하는 이가 있기는 할까.




 어릴 적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슬프게 우셨지만 나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엄마의 엄마이지만 함께 지낸 적이 없기에 누군가의 죽음에 슬프다는 감정이 생기지 않았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나서야 그 슬픔에는 ‘관계’에 방점이 찍힌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어떤 존재의 의미는 그것의 부재에 의해 더 확실해진다는 것도 알았다.

 

 그의 부재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랜 시간을 보낸 편안한 존재였고 든든한 내편이었다. 여느 연인이 그렇듯 싸우다 헤어질 뻔도 했고 위기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대화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렇게 서로의 다름을 이해했고 서로가 하나밖에 없는 내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기에 결혼했다. 당연히 앞으로의 계획도 모두 그와 함께였다. 그렇게 나를 위한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와 주던 단 하나의 내 편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잃은 것은 남편뿐만이 아니었다. 패기 넘치는 나의 30대를 잃었고, 우리가 낳아 키웠을 아이와의 시간을 잃었고, 우리가 함께 이뤄갈 꿈을 잃었다. 그렇게 꿈이라는 단어를 7년 전 남편과 함께 묻었고 이전과 같은 큰 목표도, 인생의 지향점도 사라졌다. 남겨진 이가 남편이 아니고 나라는 사실을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내가 느끼는 이 아픔을 남겨진 남편이 혼자 견딜 것이라 생각하면 더 가슴이 아팠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다. 오직 그 한 가지를 위안으로 삼고 버텼다.





이미지 출처: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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