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일 편집실, 일어나선 안될 일이 벌어졌다.

방송가에서 배운 어떤 현실

by 애미라이터

2007년 8월.

방송국 7층 작가실.

“타닥타닥.”

선배 작가들의 키보드 소리만 가득하던 오후.


나 역시 생방송을 두 시간 앞두고 스튜디오 대본을 쓰고 있었다.


그때 작가실의 최고참 선배가 내 자리로 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에 동의한다는 서명 좀 해줄래?”


영문도 모른 채 받아 든 종이 상단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 피디 성추행 관련 동의서’

내용은 이랬다.

일대일 편집실에서 편집을 진행하던 중,

피디가 실수인 척 작가의 허벅지와 옆구리를 반복적으로 접촉했고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며 해당 피디를 다른 부서로 이동시켜 달라는 요청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선배는 담담하게 말했고 나는 서둘러 다른 선배들과 함께 서명을 했다.

몇 주 뒤 그 피디는 다른 부서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후 그 작가는

“드세다”, “같이 일하기 힘들다”는 말을 한동안 들어야 했다.


방송작가가 됐다는 설렘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일은 내 열정을 빠르게 식혀버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방송가도 예외는 아니라는 걸.


며칠 뒤,

생방송 준비로 주조정실을 오가던 중

누군가 내 뒤에서 말을 걸었다.


“야, 너는… 살 좀 빼야 되는 거 아니냐?”


뒤돌아보니 50대 중반의 기술국 부장이었다.

“엉덩이가 너무 큰 거 아니냐. 그렇게 살찌면 불편하지 않아?”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갔다.

나는 입사한 지 2주밖에 안 된 막내 작가였고 그는 임직원이자 관리자였다.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배들에게 털어놔도 “직접 만진 것도 아니고 농담 아니냐”는 말이 돌아왔다.


이후로 그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외모에 대한 말을 반복했다.


나는 무에타이 체육관에 등록했고 미친듯이 샌드백을 때리며 화를 풀었다.

그리고 분노의 무에타이 때문인지 한 달 만에 8kg이 빠졌다.

어느 날 다시 마주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봐봐. 살 빼니까 보기 좋잖아.”


'너 때문이 아니야 이 변태 xx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때는 말하지 못했다.

이 바닥에서 찍히면 다시는 일을 못 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그 일 이후,

나는 이것이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이 업계가 작동하는 은밀하고도 지저분한 방식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됐다.


당시 방송가에는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공공연한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어느 방송국에서는 관리자급 인물이

“밤마다 데이트를 하면 서브에서 메인으로 올려주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넸고,


그 말은 제안이 아니라 거절하기 어려운 거래에 가까웠다.


그 관계는 개인 간의 스캔들이 아니라 조직 안에서 묵인되던 구조였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문제 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 다른 방송국의 시사교양팀에서는

회의 시간마다 성적 표현을 섞은 폭언이 반복됐다.


“이런 영상으로 시청자를 흥분시킬 수 있겠냐”는 담당CP의 말이 콘텐츠 평가처럼 사용됐고,

그 발언들은 누군가를 웃기기 위한 농담도, 우연히 튀어나온 실언도 아니었다.


그 장면이 녹취로 남아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조차 업계는 잠시 술렁였을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돌아갔다.


그 시절 방송가는

재능보다 침묵을,

실력보다 순응을

더 안전한 선택지로 만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먼저 시험대에 오르는 건

언제나 가장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특이'하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그 시절 방송가에서 이상하게도 자주 들리던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 들이었다.


18년이 지난 지금

방송가의 분위기는 분명 달라졌다.


미투 이후, 당당히 수면위로 분노를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직까지도.

여전히 권력을 이용한 언행으로 누군가는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나는 이 글을 고발하려고 쓰지 않는다.

다만 기록하기 위해 쓴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참는게 능사이고 능력인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걸 이제는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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