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진역 3번 출구, 내 집은 라꾸라꾸 침대였다.

나의 첫 서울은 별천지였다.

by 애미라이터

한강진역 3번 출구.


정확히는 이태원에 자리한 한 외주 제작사가

나의 서울 첫 일터였다.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낯설었던

스물넷 나에게

이태원은 그저

이질적인 ‘다른 세계’였다.


출근 첫날부터 지각을 했다.

지하철 노선도는 미로 같았고,


평생 지방에서만 살았던 나는

환승역에서 매번 길을 잃었다.


내가 가야 할 역과 반대편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나서야 깨달았다.


서울은 나에게 그리 친절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한강진역 3번 출구로 나왔을 때,

주변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았다.


커다란 배낭을 멘 여행객들 사이에 섞여 출근했다.


사무실을 나와 조금만 위로 걸어 올라가면

하늘에 닿을 듯 높은 담벼락을 두른 집들이 나타났다.


대궐처럼 웅장한 전원주택들.


그때의 나는 그저

“신기한 동네네” 하고 지나쳤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곳은 회장님 댁부터 연예인들이 모여 살던 한남동이었다.


낮에는 섭외 전화를 붙들고

밤에는 사무실 바닥에서 잠들던 내가,


아무렇지 않게 그런 집들 옆을 지나

출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야 묘하게 다가왔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고,

곧바로 명령이 떨어졌다.


“오늘 안에 섹시한 아이템 찾아야 해. 섹시한 거, 알겠지?”



당시 <공감 특별한 세상>을 담당했던

MBC 본부 편집국에서는

외주 제작사를 교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우리 제작사가 속된 말로 ‘나가리’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사무실을 감돌았다.


‘섹시한 아이템’이 뭔지도 모른 채

나는 일단


“넵!”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가져가는 아이템마다

날 선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다시.”

“다시.”

“다시! 야, 이게 아이템이야?

이럴 거면 짐 싸서 고향 내려가. 차비는 내가 줄게.”


사무실을 울리는 팀장의 목소리가 가슴에 꽂혔다.


출근 첫날.

나의 퇴근 시간은

그렇게 새벽 세시였다.


막차는 이미 끊겼고,

거금 3만 원을 주고 택시를 탔다.


한 달 월급 80만 원.


월세는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


연희동 사촌 오빠의 반지하 방에서

주중과 주말을 나눠 쓰며 버텼지만,


매일같이 반복되는 새벽 퇴근에

택시비를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나의 집은 사무실이 되었다.


편집실 구석,

밤샘 편집으로 새우잠을 자는 피디를 위해 마련된

라꾸라꾸 침대가 나의 안식처였다.


모두가 퇴근하고 불이 꺼진 사무실에서

담요 한 장에 의지해 잠을 청했다.


아침이면 세면대뿐인 좁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다시 섭외 전화를 돌렸다.


어느 날 팀장님이 웃으며 던진 말에

나도 따라 웃었다.


“대표님이 그러더라.
네가 밤에 이상한 잠옷 입고 사무실 돌아다닌다고.”


계속된 밤샘으로 몸이 찌뿌둥했던 이른 새벽,

근처 사우나를 찾다가


‘이태원랜드’라는 곳을 발견했다.

지금은 추억속에 사라진 이태원랜드 찜질방. 약간 세트장 같은 느낌이다. (출처:아고다)


요란한 클럽 음악과 현란한 불빛 사이,

술에 취한 외국인과 젊은이들 사이로

뜬금없이 서 있던 거대한 기와지붕 찜질방.


체감상

백 개는 되는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갔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탕에 몸을 담갔을 때,

옆에는 각기 다른 피부색과 성별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백인과 흑인,

여자의 몸을 하고 남자의 목소리를 가진 이들까지.


이른 아침,

낯선 이들과 나란히 탕 속에 앉아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현실인지,

아니면 꿈속의 다른 세계인지.


나의 서울 첫 생활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번듯한 내 방 대신 이태원의 신기한 찜질방과

차가운 라꾸라꾸 침대,

그리고 여의도 MBC를 오가며.


집은 없었지만 갈 곳은 많았던 시절.


고단함이 일상이었지만

그 기묘한 풍경 속에 내가 섞여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이상한 안도가 되기도 했던 그때.


나의 청춘은

이태원의 가파른 계단 위를

뚜벅뚜벅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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