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중의 을, 막내작가

을매나 신나게요?

by 애미라이터

외주제작사의 막내작가는
을 중의 을,

아니 병(丙)조차 되지 못하는 존재였다.


늘 내 위로 거쳐야 할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메인작가, 팀장님, 제작사 대표님, 본사 CP,

본사 부장, 본사 국장님까지.


거대한 계급의 피라미드 아래,
나는 늘 최하단에 있었다.


기똥차게 자료조사를 하고
야물딱지게 아이템을 찾고
전화기를 붙잡고 섭외를 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나날이,

꾸준히


‘얼’을 타고 헤맸다.


내가 찾은 아이템은 쌔끈하지 않았고
겨우겨우 걸어둔 섭외는

엎어지고

엎어지고

또, 엎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촬영 시작 10분 전,
피디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야! 너 대체 섭외를 어떻게 한 거야?
지금 촬영 안 한다고 난리야.
포항까지 왔는데, 이거 어떡할 거야?”


눈앞이 컴컴해졌다.


식은땀이 뻘뻘 나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날 아이템은 ‘칡’을 캐는 현장이었다.

피디가 세 시간을 달려

포항 칡 농장에 도착했는데
농장 아저씨는 단호하게 말했다고 했다.


“나는 그런 약속 한 적 없습니다.
촬영 허락한 적도 없고요.”


그 시절 휴대폰에는 녹취 기능이 없었다.
증명할 방법도, 증거도 없었다.

그리고 설령 증거가 있다 한들

현장에서 사례자가 촬영을 거부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농장 아저씨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엉엉 울면서 매달렸다.


딱 20분만 찍게 해달라고.
제발 좀 도와달라고.
이 촬영 못 하면
나 진짜 잘린다고.


상대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나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통화를 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저씨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럼 빨리 찍어요. 귀찮아 죽겠네.”


그날,

포크레인으로 칡 뿌리를 캐고
거대한 칡을 들어 올리는 장면을
피디는 겨우 찍을 수 있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날,
팀장님은 6mm 테이프를 내밀며 말했다.


“너처럼 섭외 못하고
말귀 못 알아먹는 막내는 처음이야.”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어찌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지
지금까지도
사무실 바닥의 색과 무늬가 뚜렷하게 기억난다.


그날,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틀어놓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사무실로 나와 아이템을 찾았다.


그날 이후,

한번 두번 세번...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확인병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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