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에서 만난 빌런_첫번째 이야기
방송 준비로 분주한 사무실.
“안녕하세요, 00팀 00작가인데요. 인터뷰 한 번만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지난번 연락드린 00작가입니다. 방송 촬영 생각해 보셨을까요?”
아이템을 찾고, 사례자를 섭외하느라 정신없는 서브작가들.
그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던 메인언니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번호를 확인하더니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아 오늘 기분도 별로 안 좋고 누구 한 명 작살내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됐다. 너 오늘 나한테 딱 걸렸어.”
걸려온 전화는 다름 아닌 보이스피싱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끊었을 전화.
그런데 메인언니는 스피커폰 버튼을 누르더니 사무실 전체에 통화를 울려 퍼지게 한 채 싸우기 시작했다.
“제 번호는 어떻게 아신 거죠?”
“이거 불법인 거 아시죠?”
“아니요. 제 개인정보는 어떻게 아셨냐고요.”
“네? 전화 끊지 마세요. 끊으면 제가 추적 들어갑니다. 아시겠어요?”
목소리는 점점 격양됐고,
사기꾼은 무려 40분 동안 통화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 통화내용은 사무실 전체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스피커폰에서 흘러나오는 실랑이를 들으며
눈치를 보며
조용히 섭외 전화를 걸고 취재를 해야했다.
그날 사무실은 방송국도 아니고 콜센터도 아닌
메인언니의 원맨쇼 현장이었다.
40분의 통화를 끝낸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아우~ 이제야 속이 후련하네.
야, 니들도 나한테 잘못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잘해, 이것들아. 호호호호”
그리고는 깔깔 웃으며 담배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뒤 잠시 동안 사무실엔 정적만 감돌았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메인이라니.
망했다.
그때 깨달았다.
방송국에서 진짜 무서운 건 외부의 빌런이 아니라 내부의 권력이었다.
당시 메인언니는 제작사 대표님의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덤빌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막내작가에게 사람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내일부터 나오지 마” 라고 통보했고,
평소 아니꼽게 생각했던 서브작가에게는
하루 안에 200군데가 넘는 곳에 섭외전화를 돌리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녀가 화를 내는 날이면 사무실 전체의 공기가 달라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녀도 늘 전쟁 같은 현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방식은
너무 자주, 너무 쉽게
강자 아닌
약한 사람들을 향했다.
나 역시 동료에게 “힘들다”는 말을 한 번 했다가
그 말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한동안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스피커폰에서 울리던 목소리와 표독스러운 눈빛이 선명하다.
어떤 사람은 보이스피싱과 싸우며 통쾌해했지만
우리는 그 사무실에서 매일 다른 방식으로 털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지금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메인작가다.
가끔 생각한다.
정말 고발해야 했던 건 전화기 너머의 사기꾼이 아니라
그 사무실 안의 권력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