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 바닥 좁은 거 알지? 좋게 좋게 하자

방송국에서 만난 빌런- 두 번째

by 애미라이터

내가 만난 두 번째 빌런은

역사 재연 프로그램에서 만난 메인 작가와 한 여자 PD였다.


그 PD는 작은 체구에 당찬 사람이었다.

일을 빠르게 처리했고, 현장에서도 존재감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둘만 있을 때 말이 달라졌다.


아주 거칠게.


종편실에서 편집 작업을 하던 날이었다.

전화가 걸려 왔다.


"작가님. 이거 자막 다시 뽑아주세요"


"네? 지금 당장이요?"


"하 X발, 진짜. 자막 이것밖에 못 뽑아요?"


그러더니 전화로 나에게 온갖 욕...

아니 그야말로 쌍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한참을 듣다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날 이후,

나는 메인 작가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내가 맡은 편은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고

무엇보다 재연 대본을 쓰는 일 자체가 내게는 너무 큰 고역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처음으로 없던 피부 알레르기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메인 작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너 진짜 대본 못 쓰더라.
여러 사람 괴롭게 하지 말고 그만두는 게 나아.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나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말했고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

원래 들어와야 할 페이가 3분의 2만 입금됐다.


나는 메인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너 마지막 주 회의 안 나왔잖아.

회의 참여 안 했으니까 한 주 페이는 빠지는 게 당연하지.”


“제가 맡은 VCR을 마무리 안 하고 그만둔 것도 아니고,

하루 회의를 안 나갔다고 한 주 페이를 안 주는 건 억지 같아요.”


“야! 그러니까 대본을 잘 썼어야지. 어쨌든 그 페이는 줄 수 없어.”


그 당시 방송작가들은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프리랜서라는 이름 아래 주급은 구두로만 정해졌고,

제작사들은 작가와 계약서를 쓰는 걸 꺼렸다.


그래서 임금 체불 문제를 겪어도 증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며칠 동안 속을 끓이다가 친한 언니에게 SOS를 쳤고

언니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도움을 요청해 보라 고했다.


재단 측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주급과 계약 내용, 일을 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신고가 가능합니다.”


증거.


그 단어가 그때는 참 막막했다.


하지만 나는 그 메인 작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고

대놓고 따지기보다 당시 나의 주급과 내가 맡았던 업무가

그녀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대화를 유도했다.


그리고 그 통화를 녹취했다.


나는 녹취록과 내가 쓴 대본, 메인작가와 주고받은 메일을 캡처해 제출했고

재단에서는 증거를 인정해 제작사를 상대로 정식 신고를 진행했다.


그리고 며칠 뒤 메인 작가에게 문자가 왔다.


너 이 바닥 좁은 거 알지?
좋게 좋게 해결하자. 신고 취소해라. 좋은 말 할 때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고

결국 제작사 대표가 나에게 직접 연락해 미안하다며 미납된 한 주 페이를 입금해 줬다.

이후 그 메인 작가는 대표에게 크게 혼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욕설을 퍼붓던 PD와

대표와 상의도 없이 내 페이를 깎아버린 메인 작가.


지금 생각해 보면

척박하고 치열한 방송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밟고 가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그저 빌런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자동녹취 기능을 켜놓고 모든 통화를 녹취한다.

그리고 후배들에게도 녹취는 필수라고 이야기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방송 일을 배운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방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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