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같아서 그런다! 딸 같아서!

방송국에서 만난 빌런 마지막...일까?

by 애미라이터

M본부에서 지역 특산물을 소개하는 생방송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었다.


더덕, 꼬막, 연근, 매생이, 개똥쑥….


제철을 맞아 가장 싱싱한 식재료를 직접 캐고, 영양분을 설명하고,

현장에서 요리까지 해 먹는 코너였다.


한의학 교수와 중견 배우 한 분이 MC를 맡았다.

프로그램 시스템은 단순했다.


내가 먼저 전화로 현장 촬영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마을 어르신 섭외까지 가능할지 체크한 뒤

팀장님과 메인 작가의 컨펌을 받으면

촬영 날짜를 잡고 구성안을 쓰는 방식이었다.


3월의 어느 날이었다.


기사를 검색하다가 강원도 양구 펀치볼에서

한창 시래기를 판매한다는 소식을 보게 됐다.


겨울 내내 말린 시래기들이 줄지어 걸려 있는 사진은 장관이었다.


‘이거다...!’


나는 메인 작가와 팀장님께 컨펌을 받고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다.

농장주인과 마을 주민들을 섭외하고 촬영 구성안도 나름 재미있게 썼다.


이제 남은 건 MC에게 촬영 아이템을 공유하는 것.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이번 아이템은 강원도 펀치볼 시래기예요.

다음 주 목요일 촬영이에요. 지금 그림이 정말 장관이래요.”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뭐? 펀치볼? 시래기?”


순간 목소리가 확 바뀌었다.


“야, X발. 너는 작가가 그렇게 감각이 없냐? 됐고 이번엔 무조건 곰취로 가.”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선생님, 지금 섭외는 다 끝났고 컨펌도 이미….”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거친 말들이 쏟아졌다.


“야. 이 씨X. 너 내 말 무시하냐? 내가 아는 형님 농장이 있다니까. 거기로 가.

거기서 찍으면 훨씬 그림이 잘 나와.”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말끝마다 욕이었다.


그 배우는 내가 고분고분 “네” 라고 하지 않자 점점 더 강한 말로 몰아붙였다.

마치 선택권이 나에게는 없는 것처럼.


결국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메인 작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는 잠시 침묵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바꿔야 할 것 같아. 나도… 힘이 없어. 미안해.”


나는 겨우 섭외한 펀치볼 농장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방송이 밀렸다는 거짓말을 하고 촬영을 취소했다.


그리고, 다시 그 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곰취 농장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러자 그 배우는 금세 태도가 달라졌다.


야이씨 이제야 말이 통하네.
아까 욕한건… 니가 딸 같아서 그런 거야.
딸 같아서.


나는 전화를 끊고도 한참 멍했다.

딸 같아서 욕을 한다는 말이 세상에 어디 있나 싶었다.


그리고 우리 아빠는 딸에게 욕을 한 적이 없었다.


그 뒤로 그 배우와 6개월 동안 함께 방송을 했다.

촬영장에서도 그는 종종 거친 말과 욕을 내뱉었다.


촬영해 온 영상을 프리뷰하다보면 그 배우의 욕설 때문에

마을 주민들도, 촬영 스태프들도 순간순간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자주 포착됐다.


현장은 늘 웃으며 흘러가야 했지만

어떤 날은 욕설이 공기처럼 떠다녔다.


나는 그게 가장 힘들었다.


한 사람의 말이

현장의 분위기를 무너뜨리는 순간들.


그런데도 아무도 그를 멈추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그 배우가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린다.


허풍과 허세로 가득했던 그 시절의 얼굴이

화면 너머로 다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남편도 가끔 그 배우를 보면 말한다.


“여보를 딸처럼 생각했던 그 사람 나온다.”


그럼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저 배우 딸도 없어~”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지금도 그 어딘가 촬영장에서

또 다른 작가가

비슷한 말을 삼키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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