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 먹고 간경화 극복한 사람을... 찾으라고요?

극한의 사례자 섭외기

by 애미라이터

방송을 하면서

섭외가 내 마음처럼 술술 풀렸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사례자가 척척 섭외되고

기획의도대로 인터뷰가 착착 진행될 때,

우리는 그 작가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다.
큰 공덕을 쌓았을 거다.


모든 프로그램이 다 그렇진 않지만

적어도 내가 겪은 방송 현장에서

사례자 섭외는 종종

불모지에서 기적을 캐내는 일과 비슷했다.


종편 채널에서 건강 프로그램을 하던 때였다.

기획의도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00을 먹고 질환을 극복한 사례자를 찾아라.

그리고 00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라.”


아이템이 정해지면

작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늘 같다.


사례자 섭외.


일주일 안에 못 구하면 촬영은 엎어지고

아이템은 폐기다.


그동안 수많은 일반인 사례자를 섭외해봤지만

건강 프로그램은 레벨이 달랐다.


그날의 아이템은

‘독이 되는 약’이었다.


그리고 내가 고른 ‘독 같은 약’은

비주얼과 시청률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지네'였다.


매주 떨어지는 시청률에 예민해져 있던 본사에서는

내가 제안한 지네를 한 번에 오케이했고,

그 순간부터 나는 이 아이템을 무조건 성사시켜야 했다.


인터넷 창을 켜고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지네 농장 번호를 모았다.

그리고 무작정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00 제작팀인데요.

혹시 주변에 지네 드시고 간 질환을 극복하신 분 계실까요?”


“엥?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지네 농장 30년 했는데 그런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렇게 사흘 동안 백 군데가 넘는 곳에 전화를 돌렸고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그런 사람 없다.'


전화를 끊을 때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머릿속에서는


‘아... 아이템 엎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섭외를 시작한 지 닷새쯤 됐을 때

피디님과 메인 작가 언니가 긴급 회의를 열었다.


“아무래도 사례자 섭외가 힘들 것 같아. 그냥 엎고 다른 아이템으로 가자.”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서 오기가 올라왔다.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감정에 가까웠다.


“하루만 더 주세요. 사례자랑... 지네 잡는 현장까지 제가 섭외할게요.”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하면서도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때는


이 아이템이 실패하면

내가 작가로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증명할 기회도 같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기적처럼

전화 돌렸던 사람 중 한 분의 건너 건너 인맥을 통해

지네를 먹고 간경화를 극복한 아저씨가 연결됐다.


그분은

지네를 수십 년간 다뤄온,

그 세계에서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사례자를 겨우 섭외하고 나니

이번엔 지네를 잡는 현장이 필요했다.


하루 만에

야생에서 지네를 잡는다는

‘지네꾼’ 아저씨 섭외까지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피디님…

지네 잡는 분은 섭외했는데요.

가는 길이 좀… 빡셀 것 같아요.”


“어딘데요?”


“안마도요.

전남 영광 쪽 섬인데

배 타고 다섯 시간 정도 들어가야 하고. 거긴 버스도, 택시도 없대요.”


“...일단 알겠어요. 가야죠.”


그렇게 피디님은

지네를 잡으러 안마도로 들어갔고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나 싶었지만,


갑자기 거세진 파도 때문에

예정보다 이틀을 더 섬에 갇혔다.


그 사이

예정돼 있던 피디님의 상견례는 미뤄졌다.


나흘 만에 서울로 돌아온 피디님은

사례자와 현장은 있지만

의학적 근거 없이는 방송에 나갈 수 없다고 했다.


한 사람의 경험은 과학적 근거가 될 수 없고

방송은 그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그 선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근거를 찾아야 했다.


지네는 자극적인 만큼 논란도 큰 소재였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피디님이 편집을 하는 동안

나는 논문을 뒤지고 또 뒤졌다.


‘지네’

‘지네 효능’

‘지네 간 건강’


키워드를 바꿔가며 검색했지만

딱 맞아 떨어지는 논문은 나오지 않았다.


논문이 없으면

그동안의 고생은 전부 물거품이 된다.

그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평소 알고 지내던 한의사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작가님,

한의학에서는 지네를 ‘오공’이라고 불러요.

키워드를 ‘오공’으로 바꿔서 검색해보세요.”


그리고…

정말 마.침.내.


유레카!


지네,

정확히는 ‘오공’

간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국내 논문을 찾을 수 있었다.


드디어 방송에 내보낼 명분이 생긴 것이다.


담당 교수님과 촬영 일정을 잡고

인터뷰까지 마쳤고

무사히 방송이 나갔다.


시청률이 극적으로 오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 방송은


내가 어디까지 섭외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판을 짤 수 있는지


내 '한계' 를 증명한 작업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아이템을 맡기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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